영화를 보기 전, 사람들은 기대를 갖는다. 이 영화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어떤 장르이며, 어떤 분위기인지 무의식적으로 예측을 하곤 한다. 이러한 예측은 사람들이 영화 포스터, 예고편을 통해 의도치 않게 영화에 대한 단서를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측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영화가 주는 공식적인 단서를 통해 내 취향에 맞게 영화를 선택할 수 있고, 영화에 대한 적절한 방향의 기대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씩은 이러한 예상을 뒤집어 버리는 영화들이 있곤 하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장편 영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참으로 극단적인 영화이다. 포스터를 딱 봐도, 평범한 영화는 아닌 것 같다. ‘홍도야, 우지 마라’을 연상시키는 글하며, 유치뽕짝으로 보일 수 있는 글씨체와 인물들. 처음에 포스터만 봤을 때, 이 영화를 극장에서 만나지 않을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딱 봐도 왠지 돈이 아깝게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본 후, 나는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지 못한 것이 너무나 아쉽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뻔뻔하고, 극단적인 영화이다. 러닝 타임 내내 주인공은 사랑에 빠진다. 마치 캔디처럼 그녀는 외로워도 슬퍼도 다시 일어나서 사랑을 한다. 그 사랑은 언제나 그녀를 배신하지만, 그녀는 또 사랑한다. 또 한, 영화는 대놓고 기쁨은 기쁨대로 표현하고, 슬픔은 슬픔대로 표현한다. 기쁘면 화면에 꽃이 가득하고 환해지다가, 슬프면 화면 자체가 어두침침해지고, 우울해진다. 그래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솔직하고 밝은 영화였는데, 끝에 가서 잔인한 비극으로 변한다. 권선징악은 던져버렸다. 고생 끝에 끝났던 줄 알았던 삶이 다시 시작하려는 순간, 어이 없는 폭력으로 주인공 삶이 뭉개지고 만다. 감독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삶의 끝이 허무하고, 잔인했다. 그렇다. 이 영화는 유치뽕짝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랑 받고 싶었던 한 여인의 처절했던, 그러기에 아름다웠던 삶에 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장편영화
판의 미로 - 오필리아의 세 개의 열쇠
감독이 길예르모 델 토로라고 했을 때부터 알아봐야 했다. 절대로 기분이 좋아질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 사람이 아닌데, 어찌하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아이들 판타지 영화라고 생각했는지 후회가 된다.
‘판의 미로’는 불친절한 영화이다. 이는 영화를 봤던 사람들이 금치 못했던 장면, 눈알 괴물이 요정의 목을 따서 먹는 장면만 생각해보더라도 알 수 있다. 눈알 괴물 장면뿐 만 아니다. 기괴한 판의 모습, 노인의 머리를 아들 앞에서 감정 없이 쏴버리는 장군 등 현실이든 판타지든 따뜻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어린 소녀인 주인공에게 냉혹한 현실을 강요할 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불친절하다. 문제는 이러한 불친절함이 그저 작은 불친절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을 보면, 우리는 선택을 강요 받는다. 이 영화를 동화를 받아드릴 것인지, 냉혹한 현실로 받아드릴 것인지.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내가 아이와 어른, 그 사이에서 어느 중간에 있는지 말이다. 이 영화의 열린 결말은 단순히 여운을 남기기 위함이 아니다. 보는 사람이 무엇을 보고 싶은지 결정하고, 그것을 통해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그렇기에 껄끄러워 지는 영화이다.

장준환 감독의 장편영화
지구를 지켜라!
인간적으로 마케팅은 이렇게 하면 안 된다. 포스터와 예고편만 보면, 아무리 봐도 3류 코미디 영화이다. 처음에는 신하균과 백윤식이 어디에 협박 받아서 찍은 영화인 줄 알았다. 약간 ‘행 오버’처럼 말도 안 되는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다. 막 슬랩 스틱 같은 장면을 보여주며 웃으라고 강요하는 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 영화로 치부 받는 게 안타까운 영화이다.
근데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는 웃기는 장면에서 웃을 수 없는 이야기다. 아무리 봐도, 주인공 병구(신하균)은 비정상이다. 무고한 사람을 데려다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하고, 외계인의 텔레파시를 막기 위해 사장(김윤식)의 머리를 삭발시키고, 외계인으로부터 지구를 지키겠다고 그를 고문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그저 사회에 대한 불만 때문에 헛소리를 지어내고, 미친 짓을 하는 비정상이다. 하지만, 영화의 끝을 보면 모든 것이 뒤집어진다. 병구는 진실을 외치는 유일한 사람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를 다수의 관객은 그를 비정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무리 그를 믿지 않았고, 그저 비웃었을 뿐이다. 여주인공도 마찬가지다. 못생기고, 뚱뚱한 외모.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슬픔도 그저 우리들에게는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래서 웃으면 찜찜하고 나쁜 짓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웃지 못한다. 웃으면 안 될 것 같다. 그것이 곧 비주류, 소수를 옳지 않다고 보는 시선에 옹호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영화 속 관계보다, 주인공과 주인공을 바라보는 관객에 대한 시선에 관한 영화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소수를 바라보는 시선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맘 편하게 웃기에는 불편한 영화다.
이처럼 나의 기대를 뒤집어버리는 영화들은 때로는 예상치 못한 감동에 감탄을 자아내기도 하고, 나의 오해에 대한 탄식을 내뱉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제일 안타까운 것은 내 섣부른 예상으로 보지 않고, 묻어 버린 영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영화가 치는 뒤통수가 기분 나쁘지 않다는 것이 기쁘게 만든다. 아, 또 묻힌 영화 있나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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