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하이머스타드 채널에서 시청각장애를 가진 손창환 씨의 하루 일과를 담아낸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이전에 데프블라인드라는 명칭으로 또 다른 시청각장애인의 실정을 마주하기도 했고, 손창환 씨가 몇 년 전 출연했던 영상도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후속 시청으로 이어졌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은 촉각이다. 그는 실제 시청각장애인들과 소통하며, 아무도 헤쳐가지 않던 숲을 보는 법의 지도를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
서수연 작가의 출발도 유사했을 것이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비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시각장애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화면을 설명하는 방식을 쌓아 나갔다는 사실이다. 화면해설, 여기서는 음성해설이라는 명칭을 제안한다. 더 직관적인 이해를 돕기 때문이다.
이 책은 <보이지 않지만 들을 수 있는>, <작품 수 7천 800편>, <영국에서 발견한 번역학>, <우리가 번역한 세계>, <접근성, 타인의 몸이 내게 깃들 때>의 다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첫 챕터에서는 음성해설의 세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서수연 작가는 어떻게 그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새롭게 짓는 세계
음성해설은 그 어떠한 지평과도 다르다. 특히나 본작의 작가인 서수연은 우리나라의 첫 음성해설 작가이기에 더더욱 그랬다. 앞서 걸어간 선례도, 참고할 매뉴얼도 없는 황무지에서 음성해설이라는 세계를 처음부터 지어 나가야 한다.
그가 처음 눈을 감고 드라마를 감상하며 마주한 벽은 생각보다 높고 아득했다.
“보이지 않는 상태로 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정말 어렵다는 것. 매 순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미디어의 화려함 뒤에는 늘 소외된 감각이 웅크리고 있다.” / 35p.
그러나 그는 사명감을 근거로 일어선다. “음성해설이라는 새로운 씨앗이 막 발화한 그 시점에 내가 나의 한계를 생각하는 건 불필요했다.”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나갔다.
직업인의 이야기
저자는 지난 20여 년 동안 무려 7,800편의 대본을 작성해왔다. 이 압도적인 작업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긴 세월과 투입된 노력이 늘 같은 모습이었던 건 아니다. 저자의 커리어는 작품마다 각기 다른 사연과 깨달음으로 뭉쳐져 있다.
그중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은 처음으로 코미디 음성해설에 도전했던 순간과, 99분의 러닝타임 동안 대사가 단 세 줄뿐이라 긴 여백을 온전히 음성 해설로 채워야 했던 영화 〈궤도〉에 관한 이야기였다.
2014년,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음성해설을 맡았을 때 그는 또 다시 거대한 벽 앞에 섰다. 재빠르게 지나가는 개그 호흡과 묘사가 불가능한 몸개그의 향연 속에서 저자는 “점점 나만 웃지 못하는 프로그램이 돼 갔다”고 고백한다. 코미디를 순전히 말로 번역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에서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소외감 해소’리는 본질이었다. “완벽할 순 없어도, 적어도 이 소란스러운 즐거움 속에 당신을 초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어나간 다정한 집요함이 그의 음성해설의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반면 소리가 극도로 제한된 영화 〈궤도〉는 창작자이자 매개자로서 근원적인 자기 의심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시각장애인은 음성해설 작가라는 필터를 통해 영화를 본다. 그런데 영화의 절반 이상이 해설로 채워진다면 작가의 필터가 잘 작동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100퍼센트 해설로 뒤덮인 영화를 과연 원작이라 할 수 있을까? 내 빈약한 어휘와 지루한 문장이 원작을 훼손하고 있는 건 아닐까?'" / 123p.
이때 〈궤도〉를 거치며 마주한 높은 벽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국면이 되기도 했다. 익숙하고 안정적인 커리어를 내려놓고 번역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 유학길에 오르는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이처럼 매 순간 직업인으로서 마주하는 한계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끈질기게 길을 개척해 나간 모습이 정말 한 명의 스페셜리스트로서 경외감을 자아냈다.
진정의 환대의 길로
‘무장애성(배리어프리)’이라는 용어가 장애물을 완벽히 제로(0)로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준다면, 이를 ‘접근성’으로 변환하는 것만으로 한결 가볍고 유연하게 ‘장벽 허물기’라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접근성의 본질은 무엇what을 얼마나 많이 제공하느냐의 목록 채우기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mind으로, 어떻게how 관객을 맞이하느냐의 태도에 있다. 그래서 나는 접근성의 순서를 다시 쓴다. 마음mind을 가지면 방법how이 보이고, 그제야 구체적인 무엇what을 놓을 수 있다. 나는 이를 'M-H-W의 법칙'이라 부른다.” / 261p.
지금 현재 우리가 가진 조건에서 저자가 말한 ‘M-H-W 법칙’은 접근성의 차원을 넘어, 타인을 대하는 일상의 여러 국면에서도 적용 가능할 것이다.
저자는 시각장애인 친구들과 식사를 할 때, 도움받는 것이 미안해 늘 짜장면 같은 한 그릇 음식만 고르는 친구들의 배려를 알아채고 일부러 반찬이 많은 한정식집으로 향한다. 초밥을 먹기 위해 비닐장갑을 낀 친구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에 ‘누구나 편하게 먹기 위한 방식이 있고, 그중 한 방식을 택한 것일 뿐’이라고 얘기해주기도 한다. 이처럼 직업을 넘어 일상에서도 묻어나는 접근성을 위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작가는 이 외에도 마술쇼나 무용 공연 등 여러 분야로 영토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불가능해 보이는 영역에서도 끝내 길을 찾아내고야 마는 끈질긴 직업 정신인 것이다.
아무도 헤쳐가지 않던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서두에 언급한 손창환 씨가 촉각으로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 나갔듯이 서수연 작가는 목소리로 세상의 지도를 넓혀 놓았다. 완벽할 수는 없더라도 단 한 사람의 소외감이라도 지워내기 위해 문장을 조립해온 시간. 이 책은 다정하고도 치열한 한 직업인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