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을 번역이라고 한다. 언어의 차이가 만드는 장벽을 허물어 소통이 가능해지게 하는 것이 번역의 목적이다.
다름이라는 방해물이 번역을 만들었기에 모두가 같은 언어를 쓴다면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기에 번역과 그 번역을 해내는 번역가가 존재한다. 이들은 단순히 말을 치환하고 재조립하는 사람들이 아닌 언어를 재료 삼아 소통의 부재를 해결할 수 있는 교두보를 놓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건축가가 수학적 계산 능력, 디자인을 위한 미적 감각, 견고한 내구성을 구축하기 위한 재료의 이해, 의도한 목적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구조를 쌓을 수 있는 공학적 지식 등 다방면의 복합적 지식을 적절히 조합할 줄 아는 사람이듯 번역가도 이와 비슷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제대로 된 번역가라 부를 수 있다.
화면해설, 음성해설, 큰 글씨, 낮은 위치의 버튼, 진동 의자
음성해설은 이제 화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무용 공연 <무용수-되기>에도, 이은결 마술사의 국내 최초 배리어프리 일루션 공연에도 음성해설이 제공됐다. 무용과 마술은 음성해설이 어려울 거라고 여겨졌던 대표적인 장르였다.
노안이 온 중년에게는 큰 글씨 팸플릿을, 키가 작은 어린이에게는 낮은 위치의 버튼을, 시각장애인에게는 만질 수 있는 복제품을, 청각장애인에게는 소리가 진동으로 울리는 의자와 조끼를…… 음성해설의 기반이 되는 접근성의 개념은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환대하며 문화예술 현장을 밝히고 있다.
변환은 쌍방을 전제한다. 번역가는 바꾸고자 하는 언어와 바꾸어내려는 언어를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언어는 사고방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언어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의 규칙이다. 서로 다른 규칙의 충동을 조절하면서 교집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영상 미디어의 언어를 청각 미디어의 언어로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상은 시각의 비중이 매우 높지만, 라디오나 음악 같은 청각 미디어의 오로지 청각에 의존한다. 영상을 많이 접하는 사람과 소리를 많이 접하는 사람이 살아가는 세계는 자연스레 서로 다른 규칙의 지배를 받는다. 음성 해설 작가라는 직업은 그 규칙의 차이가 만드는 균열을 메꿔가며 다리를 놓아가는 사람이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세계에서 살아가며 그 규칙을 배움과 동시에 내가 체화시킨 세계의 규칙을 그에 맞춰 조율하는 일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초창기 음성해설 방송은 늘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방송”이라는 문구로 시작했다. 이에 대해 한 시각장애 모니터 요원이 “그 표현을 들으면 뭔가 우리만 따로 떼어 놓는 기분이 들어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진정한 배려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다. ‘누구를 위한’이라는 표현은 친절해 보이지만 동시에 대상을 타자화한다. 그래서 이후 음성해설 방송 대본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이라는 문구를 삭제했다. 현재 KBS의 경우 화면 상단에 “시각·청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자막방송”이라고 짧게 자막만 띄울 뿐, 성우가 낭독할 때는 해당 문구를 읽지 않는다.
그렇기에 번역한다는 것은 언어를 서로 바꾼다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하고도 어려운 일이다. 음성 해설이라는 일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평생을 살아온 세계를 부숴버릴지도 모인 것을 향해 당차게 걸음을 내딛는 각오와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자신의 벽을 허물어가는 사람의 심지는 얼마나 단단한 것인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당장 내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세상이 나에게 이제부터 손으로 걷고 발로 물건을 잡으라고 강제한다면 누가 전과 다름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전혀 다른 미디어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만큼 파격적으로 나의 세상을 뒤집어 놓는 일이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도 벅찬데 두 가지 미디어의 언어를 배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의 세계는 아무리 낮게 잡아도 소행성 충돌 급의 격변을 겪었을 것이다.
음성 해설이라는 직업에 관심이 없더라도 내 세계를 직접 부수면서 다른 세계를 향해 넓혀가는 사람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겪어보는 건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편협한 사고는 사람을 갉아먹는다. 편협이란 말마따나 나의 잣대에 맞는, 내가 봐 온 것들만 바라보는 것이기에 세계를 부수고 넓혀갈수록 빨대 구멍만큼의 편협부터 태백산맥만큼의 편협에 이르기까지 그 편협의 폭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당연히 빨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 태백산맥의 편협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