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이 있다. 신대륙, 서인도제도, 인디언이라는 말들은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과거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의 땅은 결코 신대륙도, 서인도제도도, 혹은 아메리카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대지는 누구도 소유할 수 없고, 마음대로 나눌 수도, 나누어서도 안 되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문화제국주의적인 사고로 무장한 서구인들이 이 땅을 멋대로 신대륙이라 부르며,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다는 믿음 아래 원주민들을 ‘미개하고 나약하다’고 여기고는 그들에게 서구식 삶을 강요했다. 그렇게 오랜 기간 박해를 받다 1930년대에 이르러 절멸 직전에까지 내몰린 원주민들을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 연구를 위해 찾아가게 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한 짧은 시간의 기록이 바로 『슬픈 열대』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성’을 탐구하기 위해 원주민 사회를 연구하고자 했다. 사회, 국가, 대륙, 그리고 문명이라는 틀을 벗어나 인간의 보다 심층적이고 진실한 본질을 찾고자 했던 그는, 역사의 잘못을 반성하고 인류사의 지속 가능한 미래를 모색하고자 ‘미개사회’라 여겨지는 이들을 찾아간 것이다. 그는 그들의 방식대로 함께 생활하고, 그들이 먹는 대로 음식을 나누는 과정에서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오랜 허기 끝에 “이른바 미개인들의 ‘폭식’”을 경험하며 그것이 단순히 포만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진정한 행복임을 깨닫는다. 또한, 남비콰라족 모두의 무한한 친절, 깊은 무관심, 그리고 소박하면서도 매력적인 동물적 만족감에서 “인간적인 애정의 가장 감동적이며 가장 진실된 표현 같은 무엇”을 체험했다고 회고하고도 있다.

남비콰라족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는 현대인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인간관계를 두고 팍팍하고 정이 없다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원인을 기계적 진보에서 찾으며, 우리는 그 대가로 고독과 망각을 얻고, 세상과의 친밀성을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문명은 우리에게 편리하고 윤택한 삶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단순함과 신속함은 삶의 깊이를 앗아갔다.
기계는 점점 더 깊숙이 우리 삶에 침투하여 속도와 효율만을 중요시하는 기계적인 사고방식을 심어주었고, 그 결과 감정과 여유, 자연과의 유대처럼 인간만의 고유한 성질들은 점차 잊혀 갔다. 자연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문명에 의해 처참히 짓밟히며 출렁거림에서 얻은 산물을 내어주던 바다마저 쓰레기 처리장으로 전락해버렸다. 우리는 그렇게 자연과도, 사람과도 멀어졌고, 결국 나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조차 잊은 채 이리저리 헤매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지혜
해결의 실마리는 원주민들과 자연 사이에 맺어진 깊은 유대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말 미국 원주민의 멸망사를 다룬 디 브라운의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 따르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대지, 곧 자연이란 “위대한 정령이 내려주신 것이며 하늘과 같이 무한한 것”으로 신성하고도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바람이 거칠게 불어오고 햇빛을 가리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 모든 것이 자유롭게 숨 쉬는” 자연을 사랑했고, 그 속에서 살아갔다. 그러나 백인들이 이 땅에 발을 들이면서, 맑던 시냇물은 쓰레기와 오물로 뒤덮이고 기름진 대지는 온통 황무지로 변해버렸다. 그 참상을 지켜보는 원주민들의 눈에는 마치 백인들이 자연의 모든 것을 증오하는 듯이 보였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과거의 서구인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자연이 무너져 내리는 이 광경은 원주민들에게 너무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으로 비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삶의 기반인 자연과의 유대 없이는, 우리는 과연 누구와, 무엇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자연을 단지 도구로만 여기는 사고는 결국 인간 스스로를 – 그리고 나 자신을 – 도구로 전락시키게 될 것이다.

이처럼 원주민들의 자연에 대한 가치관은 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고 척결의 대상으로 삼았던 역사가 납득되지 않을 정도로 인간적이고 지혜롭다. 레비-스트로스 또한 원주민들의 사유 방식과 삶의 태도에 담긴 깊은 통찰을 조명하고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인간 경험의 진정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한계와 리듬을 벗어나는 것은 우리 힘 밖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분명히 하며,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릴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위치를 자각하고, 그 너머의 일들은 자신을 둘러싼 자연 혹은 영혼들에 일임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을 오늘날의 사람들보다 더 자유스럽지는 못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꿈, 이상, 신화 등으로 삶을 풍요롭게 채워갔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를 두고 우리가 숱한 좌절과 안타까움을 대가로 하여 쟁취하는 정신적인 조화를 그들 미개민족들은 흔히 쉽게 얻을 줄 알고 있었다고 말하며, 그들 삶의 방식에 깃든 조화로움과 지혜를 되새긴다.

이에 비해 서구인들은 지식의 발전이 가져온 이성을 지나치게 숭배한 나머지,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망각하고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지게 되었다. 자연과의 투쟁에서 이김으로써 얻은, 우리가 그렇게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간의 힘은 문명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고, 그 문명에 대한 맹신은 곧 자신들의 문화가 다른 모든 문화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문화제국주의적인 믿음은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원주민들을 야만적인 존재로 낙인찍고, 그들에게 서구식 문화를 강요하는 데 정당화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의 샌티 수우족의 왐디탕카는 “백인들은 걸핏하면 우리 고유의 생활을 버리고 자기네처럼 살게 만들려고 한다. (...) 우리가 백인들에게 인디언처럼 살라고 했더라면 그들도 반발했을 것이다. 왜 바꿔 생각하지 못하는가.”라고 말하며, 그들의 일방적 강요에 통렬히 비판한 바 있다.
레비-스트로스 또한 보로로족의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짚고 있다. 자신들만의 조화로운 종교체계를 지닌 보로로족에게 있어 종교를 바꾸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며, 그들의 주거 형태는 곧 종교와 깊게 연결된 삶의 방식이자 존재의 근간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종교와 주거 형태를 파괴하는 짓은 전통과 존재의 기반을 말살시키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이러한 비인간적인 지배는 원주민들을 절멸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이제는 그들의 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한때 신비로운 문화를 간직한 열대의 원주민 사회와 조화를 이루던 아름다운 아메리카의 자연까지도, 이제는 너무도 멀고도 ‘슬픈’ 이야기로 남아버렸다.

나가며
이러한 역사적 현실 앞에서, ‘야만’이라는 낙인이 누구에게 더 타당한가를 다시 묻게 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의문에 답하듯, 원주민들이 야만인이나 미개인이라는 편견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있다. 그는 아마존의 원주민들과의 생활을 통해, 그들의 물질적·기술적 수준은 서구보다 낮을지 몰라도, 종교적 사고방식이나 사회 조직과 같은 정신적·문화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고도로 발달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카두베오족의 예술 체계는 창안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독창적이고 매우 세련되어 있었으며, 남비콰라족 언어의 근원적 특성을 고려할 때 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미개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과 다른 언어, 생활, 가치관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열등하다고 규정하고 철저히 억압해왔다.
이러한 구조적 억압은 마치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을 떠올리게 한다. 아렌트에 따르면, 악이라는 것은 인간 내면에 본질적으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은 1차원적이고 피상적이며 깊이가 없는 사유에서 비롯된 ‘무사유’의 경향성으로 깊은 사유를 거부하고 자신의 행위가 타자에게 미치는 윤리적 결과를 성찰하지 않는, 즉 도저히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해볼 수 없는 무능력함에서 발생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원주민에 대한 억압과 말살은 ‘민족적 우월감의 사상’에 기반을 둔 ‘무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이해하지 않으려는 그 침묵과 서구우월주의에 대한 복종은 끊임없이 악을 재생산하기에 이르고, 원주민에 대한 억압과 폭력의 기나긴 역사가 악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기나긴 역사의 악의 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사유’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는 것 - 이것이 진정한 사유의 시작이다. 오랜 시간 원주민들의 관점에서 그들에게 어떤 해악이 가해질지 생각해보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인류 전체에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성찰하지 못했다. 이제는 이 역사를 비판적으로 되짚고, 그 잘못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깊이 사유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비판적인 사유의 단계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보다 나은 사회로 도약하기 위해, 우리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자로서의 태도’를 배우고 꾸준히 실천하려고 해야만 한다. 그것은 우월함의 잣대를 내려놓고, 초연한 시선으로 타인을 하나의 같은 인간으로 바라보며, 그의 입장에 서보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편견과 선입견을 거두고 순수한 관심으로 타인을 응시하는 태도가 곧 진정한 의미의 인간애이며, 박애가 아닐까?
부족사회 속 원주민들의 입장이 되어 이들의 삶에 깃든 지혜를 우리 사회에 비추어 성찰하고 그 가치를 실천에 옮기는 것. 바로 그것이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박애정신의 구현이자, 수천 년간 되풀이됐던 악의 역사를 끊어내는 첫걸음이다. 마치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인류가 오랜 기간 놓쳐버렸던 인류애를 다시금 되찾아야 한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보다 평등하고 상호부조적인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