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쓰인 묘사만 읽어도 눈앞에 형상이 떠오른다. 그만큼 친숙하고 유명한 그림, 에드바르트 뭉크의 「절규」. 이 작품을 SF 장편소설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오랜만에 마주했다.
필 레시는 한 유화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없고, 뭔가에 짓눌린 피조물이 묘사된 작품이었다. 머리는 뒤집어놓은 서양 배 같고, 공포로 인해 양손으로 양쪽 귀를 덮었으며, 입은 크게 벌려서 소리도 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피조물의 고통이 만들어낸 뒤틀린 잔물결, 그 울부짖음의 메아리가, 피조물 주위의 공기를 가득 채웠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피조물은 자기 자신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기에 이르렀고, 스스로의 소리를 막으려고 양손으로 귀를 덮었다. 그 피조물은 어느 다리 위에 서 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그 피조물은 고립 상태에서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의 절규에 의해서(또는 절규에도 불구하고)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12장 중
에드바르트 뭉크, 「절규」, 1893.
소설의 주인공인 릭 데카드는 감정 이입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안드로이드를 잡아들이는 현상금 사냥꾼이다. 뭉크의 「절규」 묘사는 유명 오페라 가수이자 안드로이드인 루바 루프트가 뭉크 전시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행하고 있던 필 레시와 함께 그녀를 추적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필 레시는 릭과 대화하던 중 「절규」 앞에서 꽤 오랫동안 작품을 감상한다. 그는 작품에 표현된 감정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감정 이입 능력이 떨어지는 인간인 것이다. 반면 안드로이드인 루바 루프트는 뭉크의 「사춘기」 그림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 복제품을 가지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루바 루프트는 전시회 카탈로그를 손에 들고, 반짝이는 테이퍼드 팬츠에다, 역시나 반짝이는 금색 조끼 같은 윗도리를 걸치고, 앞에 걸린 그림에 푹 빠진 채 서 있었다. 양손을 한데 모으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서, 당혹스러운 놀라움과 함께 새롭고도 어리둥절한 두려움의 표정이 얼굴에 각인되어 있는, 한 어린 소녀의 그림이었다. —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 12장 중
에드바르트 뭉크, 「사춘기」, 1894-1895.
그녀는 안드로이드이지만,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감정 이입 능력을 보여준다. 필 레시와 루바 루프트, 이 두 인물의 감정 이입 능력을 대비해서 보여주는 그림으로 「절규」와 「사춘기」 가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뭉크의 그림이어야 했을까? 그의 그림에 어딘가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을 꼬집는 힘이 있어서는 아닐까.
‘마음 깊숙한 곳을 꼬집는 힘’은 그의 삶으로부터 시작됐다. 에드바르트 뭉크는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와 누나를 결핵으로 잃었으며, 아버지는 종교에 광적으로 빠져들어 그를 압박했다. 이 과정에서 뭉크라는 작가에게 죽음과 병, 불안이라는 소재는 필연적이었던 듯싶다.
뭉크의 초기 작품은 우리가 「절규」로 기억하는 표현주의적 이미지와 비슷한 듯 다르다. 언뜻 인상주의 비슷한 느낌이 나는가 싶다가도, 막상 인물화를 바라보면 느껴지는 감정이 무겁다. 누나를 기억하며 그린 「병든 아이」가 특히 그렇다.
에드바르트 뭉크, 「병든 아이」, 1885-1886.
이런 깊은 감정선은 상징주의, 표현주의 형식의 작품으로 점차 이동해갔다. 우리가 가장 잘 기억하는 「절규」부터 「불안」, 「절망」, 그리고 「뱀파이어」나 「마돈나」까지 유명한 작품들은 모두 1893~1894년 처음 등장했다. 아버지와 남동생의 죽음, 여동생의 정신병, 실패한 사랑까지. 그를 가만두지 않던 많은 상황이 작품으로 표출된 것이다.
꾸준한 작품활동을 통해 에드바르트 뭉크는 점차 유명해졌으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여전히 명성과는 별개로 개인의 삶은 불안정했다. 마지막 연애가 끝나고 정신적으로 온전치 않은 때에는, 코펜하겐 정신 클리닉에서 8개월 동안 입원하며 치료받아야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이후에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에드바르트 뭉크, 「태양」, 1911.
치료 이후의 그림으로 오슬로 대학교 대강당 벽화로 그린 작품인 「태양」이 있다. 극야 이후 뜬 해를 그린 이 그림은 뭉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만큼 우울하지 않지만, 외려 그래서 더 사랑받는 작품이다.
노르웨이는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발생하는 나라다. 뭉크의 작품 중에서도 밤의 시간대를 표현한 풍경화나 인물화에서 종종 나타난다. 이런 백야와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 극야다. 극야는 반대로 낮에도 해가 뜨지 않는 현상인데, 극야가 이어지던 겨울이 마침내 끝나고 떠오른 태양을 그린 그림이 바로 「태양」이다.
며칠이고 검은 세상에서 살다가 떠오른 태양의 빛을 마주한다고 생각하며, 우울의 끝에서 뭉크가 느꼈을 삶의 희망을 상상으로나마 체감해 본다. 무너진 한 사람이 절망에서 가장 먼 감정까지 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위안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