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면서 이동진의 파이아키아를 틀어놓는다.
물소리 때문에 안 들리는 순간이 더 많지만, 아침부터 숏츠에 빨려 들어갈 바엔 팟캐스트처럼이라도 틀어놓고 머리를 깨워보려는 알리바이 같은 거다. 엄청난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은 아니다. 다만 하루의 시작부터 아무 의미 없는 자극에 손가락을 맡기고 싶지는 않아서, 누군가가 오래 생각한 말을 틀어놓는다.
그렇게 매일 틀어놓다 보니 이상한 일이 생겼다. 영상이 언제 올라온 건지 자꾸 헷갈리는 것이다. 3년쯤 된 영상이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불과 몇 달 전 영상이었고, 며칠 전 올라온 줄 알았던 게 몇 년 전 영상이었다. 처음엔 내 시간 감각이 무뎌진 줄 알았다. 그런데 헷갈리는 지점이 늘 똑같았다.
그가 쓴 빨간 안경이었다.
빨간 안경은 이동진의 트레이드마크다. 그런데 이 안경이 묘하게 시대를 입고 있다. 어떤 영상에서는 한참 지난 유행처럼 보이고, 어떤 영상에서는 막 꺼낸 듯 새것처럼 보인다. 같은 사람, 같은 안경인데도 그렇다. 화면의 밝기 때문인지, 머리 스타일 때문인지, 그날의 옷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그 영상을 보는 아침의 기분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처음엔 웃겼다. 내가 이제 안경까지 보고 있네, 싶었다. 그런데 한참을 보다가 깨달았다. 이 사람은 안경 하나에도 어떤 의미를 두는 사람이구나. 표면이라고 부를 법한 것에까지 시간을 들이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의 영상을 오래 보다 보니 나도 그 표면을 그냥 넘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깨달음이 사소해 보일 수 있다. 안경 색이 뭐 그리 대수냐고. 그런데 나는 이 사소함이 파이아키아라는 채널 전체를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유튜브는 빠르게 소비되도록 설계된 공간이다. 알고리즘은 짧고 자극적이고 즉시 삼켜지는 것을 위로 올린다. 썸네일은 더 세게 말하고, 제목은 더 크게 외치고, 영상은 조금이라도 지루해질라치면 다음 것으로 넘겨진다. 그런데 파이아키아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영화 한 편을 30분, 길게는 한 시간 넘게 붙잡고 늘어진다. 책 한 권을 소개하면서도 줄거리만 요약하지 않고, 그 책이 지금 왜 읽혀야 하는지까지 천천히 끌고 간다.
채널 이름도 그렇다. 파이아키아는 오디세우스가 긴 여행 끝에 도착해 자신의 모험담을 오래 들려주었던 섬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빠르게 도착하는 이름이 아니라,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을 앉아서 오래 듣는 이름이다. 애초에 이 채널은 요약의 속도가 아니라 서사의 속도를 갖고 있다.
빠름이 기본값인 플랫폼에서, 이 채널은 작정하고 느리다. 그리고 그 느림은 보는 사람에게도 옮는다. 빨간 안경 하나에 시간을 들이는 사람을 오래 보다 보니, 나조차 그 표면을 오래 들여다보게 됐고, 그러다 시간 감각까지 흔들린 것이다. 빠르게 소비했다면 결코 눈치채지 못했을 일이다.
느리게 본다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지, 나는 한 영상에서 더 분명히 느꼈다.
‘관계의 가성비를 따지는 세상, 이 시대의 가족은?’이라는 제목의 영상이었다. 그날도 나는 샤워를 하면서 대충 틀어놓고 있었다. 몸은 물을 맞고 있었고, 귀는 절반쯤 열려 있었다. 그러다 한부모 가구 이야기가 나왔다.

본론 전에 이동진은 통계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통계는 개인의 인식과 행동을 좌우하는 지표라고. 예를 들어 “요즘 결혼 안 하는 사람이 많다”는 통계가 깔려 있는 사회에서는, 결혼을 안 하기로 한 결정이 훨씬 가볍게 느껴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하면서. 반대로 “다들 결혼한다”는 분위기가 통계로 깔리면 비혼이라는 선택지가 훨씬 도드라져 보인다. 같은 선택이어도, 그 선택이 놓인 숫자의 분위기에 따라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통계를 제대로 잡고 파악해야 실효성 있는 정책이 가능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얄팍하게 뭉뚱그린 숫자로 만든 정책은 헛돈다는 얘기겠지, 하면서 영상을 계속 봤다.
최근 한부모 가구가 늘어가고 있다는 통계를 사람들이 봤을 때,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그림은 20~30대 젊은 부모가 미성년의 아이를 키우는 모습이다. 나도 그랬다. 한부모 가구라고 하면 자동으로 그런 얼굴이 떠올랐다. 젊은 엄마나 아빠, 어린아이, 양육비, 경제적 어려움 같은 단어들이 거의 한 세트처럼 따라왔다. 그런데 그 통계를 자세히 쪼개보면 다른 그림이 보인다고 했다. 40대인 성년의 자녀가 70~80대 장년의 부모와 사는 경우가 꽤 많아서 한부모 가구 수가 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씻다 말고 한 대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아, 이런 걸 놓쳤구나 싶었다.
숫자는 분명 같은 숫자인데, 그 안에 들어 있는 얼굴은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한부모 가구’라는 말을 듣고 너무 빠르게 하나의 그림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통계가 말하는 가족의 형태를 제대로 들여다본 적도 없으면서, 이미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기타 음이 생각났다.
영상을 보기 이틀 전인가, 친구가 집에서 기타를 쳐줬었다. 오랜만에 잡아본 기타로 같은 음을 다른 위치에서 쳐주는 걸 보여줬다. 같은 줄을 짚고 손 위치만 옮겼는데, 같은 음이 다른 옥타브에서 울렸다. 같은 바이브의 음인데, 음역대만 달랐다. 분명 같은 음인데, 듣는 감각은 완전히 달랐다.
씻다가 그게 갑자기 떠올랐던 거다. ‘한부모 가구’라는 라벨이 딱 그렇게 울리고 있었다.
20대 미혼모와 어린아이도, 40대 비혼 자녀와 70대 노부모도, ‘부모 한 명과 자녀 한 명으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본질에서는 같은 음이다. 그런데 한쪽은 아이 양육과 경제적 취약함이라는 음역대에서 울리고, 다른 한쪽은 노년 돌봄과 중년 부양이라는 전혀 다른 음역대에서 울린다. 같은 음인데 옥타브가 너무 멀어서, 한쪽 옥타브만 듣고 있던 사람의 귀에는 다른 쪽이 아예 들리지 않는다.
나는 씻다 말고 호다닥 메모장에 한 줄 적었다.
한부모 가구 - 기타 음

얼마나 급했으면 비누 거품 묻은 손으로 이렇게 써놨을까 싶다. 그래도 적어두지 않으면 금방 사라질 것 같았다. 샤워 중에 떠오른 생각들은 대체로 그렇다. 물소리 사이에서 갑자기 선명해졌다가, 수건으로 몸을 닦는 순간 어디론가 흩어진다.
급했던 이유는 아마 이런 거였던 것 같다.
라벨이 하나면 머릿속의 그림도 하나로만 떠오른다. ‘MZ세대’, ‘1인 가구’, ‘노인’, ‘청년’, ‘가족’ 같은 단어를 들으면 자동으로 어떤 얼굴이 그려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얼굴에 맞춰서 정책을 만들고, 누군가를 응원하고, 누군가를 동정하고, 누군가를 비난한다.
그런데 그 단어가 사실은 한 음이 여러 옥타브에서 동시에 울리고 있는 거라면, 우리가 듣고 있던 건 그중 한 옥타브뿐이다. 나머지는 통계 안에 있어도 들리지 않는다. 존재하지만 들리지 않는 소리. 숫자로는 잡히지만 상상으로는 도착하지 않는 사람들.
그게 무섭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안다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한 가지 버전만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부모 가구라고 하면 젊은 부모만 떠올리고, 1인 가구라고 하면 자유롭게 혼자 사는 청년만 떠올리고, 노인이라고 하면 돌봄의 대상으로만 떠올린다. 그러나 같은 단어 안에도 전혀 다른 삶의 속도와 무게가 들어 있다. 한쪽은 외로움의 문제일 수 있고, 다른 한쪽은 생존의 문제일 수 있다. 한쪽은 선택의 결과일 수 있고, 다른 한쪽은 어쩔 수 없이 떠안은 구조일 수 있다.
빠르게 보면 라벨은 하나의 그림이다. 오래 들여다보면 여러 겹이다.
결국 빨간 안경과 ‘한부모 가구’는 같은 이야기였다. 빠르게 지나치면 안경은 그냥 빨간 안경이고, 한부모 가구는 그냥 젊은 부모다. 오래 응시해야 안경 안의 시간이, 단어 안의 다른 사람들이 비로소 보인다. 표면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더 안쪽으로 들어가는 입구였던 것이다.
파이아키아가 내게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 있다. 이 채널은 단순히 영화와 책을 소개하는 채널이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를 오래 보는 방식 자체를 보여주는 채널이다. 영화도, 책도, 사회적 단어도 쉽게 요약하지 않는다. 좋다, 나쁘다, 봐라, 보지 마라로 끝내지 않는다. 왜 그렇게 느꼈는지, 그 느낌이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너무 빨리 지나친 것은 없는지 계속 되묻는다.
그런 태도는 가끔 답답할 만큼 느리다. 그런데 바로 그 느림 때문에 보이는 것들이 있다. 빨리 가면 하나의 결론만 남지만, 천천히 보면 결론에 도착하기 전의 망설임과 갈래들이 보인다. 나는 그 갈래들이 좋다. 정답보다, 정답에 도착하기 전까지 놓인 질문들이 더 오래 남을 때가 많다.
파이아키아의 구독자가 이렇게 많은 것도 그래서 흥미롭다. 나는 이들이 단지 영화 해설을 들으러 모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빠른 소비를 기본값으로 삼은 시대에, ‘오래 보는 법’ 자체가 희소해졌기 때문 아닐까. 요약본, 숏폼, 한줄평, 별점 사이에서 우리는 점점 한 대상을 오래 붙잡는 감각을 잃어간다. 그러니 빠르게 소비되지 않는 것을 다루는 사람을 보며, 잠시 잃어버린 그 시선을 빌리는 건지도 모른다.
나도 사람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 안의 결을 옮기는 일을 하고 싶다. 누군가의 직업을 단순한 이력으로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어떤 감정과 태도로 지금의 자리에 왔는지 보고 싶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영화, 하나의 책, 하나의 장면을 좋고 나쁨으로만 판단하기보다, 그 안에 어떤 옥타브의 소리가 숨어 있는지 들어보고 싶다.
그래서 매일 아침 물소리 너머로, 가장 느리게 보는 사람의 목소리를 틀어두는 것 같다.
사실 나는 여전히 빠른 것들에 쉽게 휩쓸린다. 숏츠도 보고, 릴스도 보고, 별생각 없이 넘기다가 시간이 사라지는 일도 많다. 그래서 더 의식적으로 느린 목소리를 틀어둔다. 절반은 물소리에 묻혀도 괜찮다. 다 듣지 못해도, 그 태도만은 아침의 어딘가에 남는다.
오래 보는 일은 비효율적이다.
하지만 어떤 마음은 오래 보아야만 들린다.
같은 음이라도 다른 옥타브에서 울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내일 아침에도 아마 파이아키아를 틀어놓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