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야기를 담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바쁘디바쁜 이 세상에서 우리는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스쳐 지나가는 한 명 한 명이 모두 자신만의 삶 속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그중에서도 팔순이 넘은 할머니들의 삶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춘다.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과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실제 문해학교 할머니 학생들이 쓴 20여 편의 시를 뮤지컬 넘버로 재탄생시켰다.
주변부에서 극의 중심으로, '가장 시를 쓰기 좋은 나이'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제목에 쓰인 여자아이를 뜻하는 방언 ‘가시나’를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가장 시를 쓰기 좋은 나이’라는 의미로 재해석해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인생의 모든 굽이굽이가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배움에는 결코 때가 없다는 점은 전 세대를 아우르는 따뜻한 희망과 격려로 다가온다.
특히, 서양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나 영웅의 일대기를 주로 다루는 기존 뮤지컬 문법에서 벗어나 '지역 노년 여성'을 무대의 중심에 세웠다는 점이 독특하다. 평생 자기 인생에서도 조연을 자처하며 살아왔던 할머니들이 비로소 인생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는 순간을 무대 위에 생생하게 구현해 낸다.
그동안 사회에서 '할머니들'로 뭉뚱그려져 여겨지던 인물들은 영란, 인순, 분한, 춘심이라는 고유한 이름과 서사를 지닌 개인으로 객석 앞에 선다.
한글을 통해 마주한 과거와 성장
극 속 문해학교 할머니 학생들은 각자의 인생이 담긴 시를 노래하는 개인 넘버를 가지며 서사를 이끈다.
글을 모른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손주가 내민 동화책을 피해 부엌으로 숨어야 했던 '영란', 가슴 한편에 묻어둔 가수의 꿈을 잊지 못해 노래자랑에 나가는 '춘심', 첫사랑이 읊어준 시를 평생 품고 살아온 '인순', 아들을 낳지 못해 '분하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 내내 부끄러웠던 '분한'까지. 이들은 한글을 통해 자신의 결핍과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어엿한 주인공으로 성장한다.
영란, 춘심, 인순, 분한은 결코 ‘할머니’라는 나이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들은 시를 읽으며 첫사랑을 떠올리는 소녀가 되었다가, 글을 몰라 아들 앞에서 쩔쩔매던 서툰 엄마가 되기도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머리가 희어져도 여전히 해맑은 어린 딸로 돌아간다.
‘글씨를 몰라 억눌렸던 시간’을 지나, 각 캐릭터가 ‘내가 쓴 시’를 직접 노래하는 순간은 관객의 마음에 먹먹한 울림을 남긴다.
관객과 함께 호흡하는 열린 무대
관객과의 자연스러운 소통과 참여를 유도한다는 점도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만의 큰 매력이다.
뮤지컬 특유의 경직된 관람 문화에서 벗어나, 단체 넘버가 나올 때는 자연스럽게 박수를 치며 무대를 즐길 수 있는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극장 앞에 마련된 포토존은 극의 소품을 활용해 인증 사진을 남길 수 있도록 세심하게 기획되었으며, 매주 주말 진행되는 싱어롱 커튼콜 데이는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참여의 경험을 선사한다.
무대를 넘어서 일상으로 이어지는 온기
"할머니들이 글 배우는 이야기에 누가 관심을 가질까?"
극 중 석구 PD의 대사처럼, 처음 극의 소재를 접했을 때 스쳤던 일말의 의구심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극 속 인물들은 더없이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웠으며,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아이이자 소녀, 그리고 엄마의 모습이었기에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나이와 직업에 상관없이 누구나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평범해 보이는 모든 사람의 이야기도 무대 위에 오를 만큼 훌륭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극장을 나서며, 길거리나 공원에서 스쳐 지나가는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굴곡진 인생과 숨겨진 사연들이 문득 궁금해졌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이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웰메이드 가족 뮤지컬로 굳건히 자리매김하여, 앞으로도 오랜 시간 꾸준히 무대에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5월 15일 개막해 6월 28일까지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된다.
사진 제공 - 라이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