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일까지 박수 받으며 마무리된 연극 <아트>는 분명 웃다가 나오는 극이다. 대본상으로도 코미디적 요소가 있지만, 이를 살리는 배우들의 연기와 합이 아주 재밌다. 그래서 처음 아트를 보았을 땐 이제 흰 바탕의 네모난 것만 봐도 웃길 것 같다고 했다. 소위 말하는 ‘깔깔극’이 이거였구나 싶어서 그날 밤쯤 또 표를 잡았다. 누가 봐도 즉석에서 치는 것이 분명한 애드리브, 편안하게 관객과 호흡하는 순간들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던 관람 회차였고, 당시 분석에 지친 필자를 자유롭게 해방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아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Ⅰ. 흰 캔버스 같은 이 공연의 매력이 무엇인가

<아트>는 대본상의 여백이 많고, 그래서 '공연'으로 올렸을 때가 중요하다. 이 공연에는 특별히 극적이거나 대단한 연출이 있지는 않다. 무대도 일정한 톤으로 화려하지 않은 편이다. 세 가지 화풍의 그림이 현대미술화를 중심으로 놓여있고, 가운데에는 소파가 있다. 조명의 경우도 암전과 비슷한 톤의 조명이 밝기를 조절해 가며 사용될 뿐, 여러 색이 사용되지 않는다. 무대와 조명 등의 연출만 두고 보면 자칫 심심해질 수도 있는 구성이다. 그러나 이 극은 분명 재밌다. 관객들은 극을 보는 내내, 그리고 나와서까지도 배를 잡고 웃는다. 단순히 웃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연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왜일까? 이 극은 누가 봐도 코미디지만, 그렇다고 웃기기'만' 하는 극은 아니다. 우선 플롯은 크게 어렵지 않다.
“오랜 우정을 지켜 온 세 친구 세르주, 마크, 이반. 어느 날 세르주가 산 150x120cm짜리 하얀 캔버스엔 흰색 바탕에 흰색 줄이 처진 하얀 그림이 있다. 이 그림 한 점으로 인해 세 친구는 지난 수년간 쌓아온 감정들을 터뜨리고, 상황은 점차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닫는다.”
일차적으로 플롯과 공연을 본 후 바로 와닿은 것은 ‘세르주가 산 작품 한 점 때문에 일어나는 세 친구의 다툼 이야기, 그런데 이제 개그를 곁들인.’이다. 아무래도 이 극은 재미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절친한 친구가 콘셉트인 만큼, 서로가 인정도 하고 자기주장을 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다투는 모습도 자연스러워야 몰입하기 수월하다. 그래서 세 명의 배우의 합이 특히 중요하다. 필자는 '박영수/김도빈/조풍래' 페어로 봤다. 실제로 친구인 셋이 그리는 셋의 우정은 ‘진짜’였고, 어색하지 않았다. 이들의 16년 우정이 빛을 발하는 것이다. 무대인사에서도 밝혔듯이,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슈또풍’ 페어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무대 위에서도 아래서도 진실한 편함. 덕분에 공연 중에도 각자 드립이 난무하는데도 서로가 무리 없이 받아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이 연극이 단순히 개그 극이라기엔 마지막에는 제법 진지하게 끝난다. 그래서 처음 관람한 후엔, 이 극이 실컷 웃고 난 뒤 갑자기 끝내려는 느낌이라 의아했다. 단순히 웃기기만 하다는 이유로 <아트>가 사랑받아 왔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아쉬운 구석이 있다. <아트>의 매력은 미술을 빙자한 '우정' 이야기에 있으므로.
Ⅱ. 익숙한 ‘세 친구’ 조합
사실 이 세 친구의 주파수가 맞는 순간은 거의 없다. 직업도, 관심사도, 성향도 상당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장치가 ‘그림’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집에 그림 한 점씩을 가지고 있다. 무대를 살펴보면 좌측에는 마크의 풍경화, 우측에는 이반의 아버지가 그렸던 정물화, 가운데 벽에는 세르주의 현대미술 그림이 있다. 심지어 마크는 액자에 넣어 걸고, 이반은 세워두고, 세르주는 액자 없이 (아티스트의 의도대로) 걸어둠으로써 이를 전시한 방식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취향의 차이를 드러내 주기도 하지만, 극과 결합하면 인물의 성격을 더 잘 이해시키는 역할을 한다.
가볍게 해석해 보자면 이런 식이다. 결정을 잘 못하는 우유부단한 이반은 그림에서도 그다지 취향은 없지만 친구들과 가족들을 아끼는 모습이 그림에서도 드러난다. 마크는 고전과 명언을 좋아하는 지적이고 고전적 성향으로, 적당한 화가가 역사가 긴 화법으로 그린 그림과 잘 어울린다. 세르주는 제법 감정적이고 직관적이며, 세련되고 동시대인이 되고 싶어 하는 그의 욕구가 그림 선택에서도 보인다. 이렇게 성격과 취향이 다르지만, 이들은 무려 25년지기 친구다. 셋은 유머를 하며 웃고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왔다.
현실에서도 제법 많이 보이는 이 세 친구의 조합은 사소한 일들로 다투기 시작하다 극단까지 치닫는단 점마저 현실적이다.
Ⅲ. 누구나 겪을 법한, 아주 현실적인 우정 이야기
“우리는 왜 친구인 걸까.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데.”, “25년 우정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언젠가 들어보거나 말했을 법한 대사들이다.
공연은 “제 친구 세르주가 그림을 하나 샀습니다.”라는 마크의 발언으로 열고 닫는다. 겉으로는 마크와 세르주의 주된 갈등은 그림을 산 세르주와 이를 깎아내린 마크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이반은 중간에서 휘말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취향’의 차이로 시작된 다툼, 그러나 실질적인 갈등은 그것에서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이반은 무력한 친구가 아니다. ‘미술’로 대립하던 세르주와 마크의 갈등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마크는 현대미술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멋지고 대단하게 봐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그러나 세르주는 현대미술을 좋아하고, 새로운 시대에 맞춰 여러 사람과 만나 생각의 폭을 넓히려 한다. 마크는 그런 세르주가 못마땅하다. 정확히는 서운하다. 마크와 어울리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보다 ‘대단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기가 모르는 관심사가 생기는 과정이 꼭 친구가 변하는 것 같고 멀어지는 것 같다. 그 불안감 혹은 질투심이 세르주가 산 앙뜨로와의 그림을 두고 ‘이 판때기’라 명명하며 비하하게 된 근본적 원인이다.
갈등의 한복판에서 이반은 정신과 의사에게 구한 마크와 세르주 간의 갈등에 대한 조언을 전한다. 그는 정신과 의사의 말을 종이에 그대로 적어와 읊는다. “내가 나인 것은 내가 나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당신인 것은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이다...”로 시작하는 다소 장황한 문장들은 이를 듣는 친구들의 반응처럼 황당하고 웃기다. 그렇지만 웃음을 참고, 그 문장들을 관계에 적용해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이 관계에 있어서 셋은 서로의 존재 ‘조건’이 아니다. 그러니까 세르주의 존재는 마크의 존재 조건이 아니며, 그 반대도 그렇다. 세르주가 세르주이기 때문에 마크가 마크인 것이 아니라, 세르주는 세르주고 마크는 마크고 이반은 이반이기 때문에 셋은 친구인 것이다. 그러니 이들이 끝끝내 화해할 때도 대단한 방법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서로가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세르주는 자기는 먹지도 않는 올리브를 이반과 마크를 위해 집에 구비해둔다. 마크를 위해 이반의 펜을 빌려 그림에 선을 그으라고 말한다. 이후 “물로 지워지는 수성펜이라는 것을 알았냐”라는 질문에 세르주는 모르는 척 “몰랐다.”라고 답한다. “진실을 말해야 했을까, 하지만 합리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라면서 세르주의 방백은 마무리된다. 마크는 자신의 성질을 죽이고 다시 그 그림을 보겠다고 하며 세르주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 마침내 이반의 호의로 펜을 든 세르주는, 친구가 좋아하는 그림을 해하기 싫어서 ‘스키 타는 남자’를 빨리 그려버린다. 그리고 이반은 자기 고집 센 두 친구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를 자처하며, 흰 도화지처럼 셋의 우정을 품어주었다. 물론 서로가 서로에게 열받는 행동을 해서 다시 다투기는 하지만, 그 친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 애써 노력해본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어떤 우정은
시작과 끝에 똑같은 문장을 말하는 똑같은 인물. 그러나 그 끝에 도달하는 감정은 처음과 같지 않다. “스키를 타는 한 남자가 여기, 있습니다.”가 '마크'의 입에서 나온다는 점에서부터. 이들은 여백의 회복 기간이 필요했다. 품어오고 쌓이기만 한 채로 가져온 감정들을 풀어낼 ‘대화’라는 회복 기간이. 흰색 캔버스에 쳐진 흰색 줄까진 없더라도, ‘스키 타는 남자’가 그려졌다가 지워진 찰나의 순간은 그 캔버스에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해하지 못한 차이, 비어버린 공통점도 다시 맞춰지면서 찾아가지 않을까.
그리고 친구 사이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키를 타고 지나가는 ‘찰나’처럼 서로 온전히 들어맞는 때는 한순간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여기 우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관계 아닐까 싶다. 흰 판때기가 그 자체로 예술 작품으로 수용 되었듯이. 그리하여 어떤 우정은 그냥, 거기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