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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계절의 장면은 영원히 닳지 않는다.

   

내게는 어린 날의 겨울 풍경이 그렇다. 처음 가 본 눈썰매장에서 아빠와 함께 썰매를 타고 내려와 환하게 웃던 순간. 엄마는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고 덕분에 그날은 앨범 속에서도, 내 기억 속에서도 여전히 생생하다. 20년도 더 지났을 그날의 기억은 뼈마디가 시릴 만큼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해 주는 온기와도 같은 추억이 되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떠올리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계절의 한 장면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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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겨울의 모든 기억이 따뜻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같은 계절이지만 하염없이 내리는 눈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던 날도 있었다. 몇 년 전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던 때가 그랬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삼일의 장례식을 마치고 화장터로 향하기 위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물들어 있었다.


친척들을 태운 장례 버스 밖으로는 내내 설원이 펼쳐졌다. 버스 안에서는 지친 숨소리만이 침묵을 가득 채우던 그때, 나는 소복이 쌓인 눈을 보고 그만 '예쁘다'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뻔했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삼켰던 그 말이 내내 속에 얹혔다.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이별의 슬픔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퍽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새하얀 설원을 보며 나도 모르게 경탄이 새어 나올 뻔했던 순간에, 나는 내가 몹시 미워졌다. 그해 겨울,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힘껏 슬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할아버지에게 표할 수 있는 마지막 애도라고 여겼다. 내 삶에 슬픔이 찾아왔다면 그 감정에만 오롯이 젖어 들어야 한다고, 내가 홀로 정해둔 애도의 기간 사이에 조금이라도 행복에 가까운 마음이 끼어들까 싶어 스스로를 엄정히 단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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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길가에 제멋대로 피어난 들꽃을 보며 문득 생각한다. '아, 행복하다.' 그저 이런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충분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행복은 찾아온다. 그리고 슬픔과 괴로움도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여러 가지 색이 모여 하나의 풍경이 되듯, 이 모든 감정이 모여 비로소 하나의 삶이 된다. 행복하기만 한 삶도, 슬프기만 한 삶도 있을 수 없다. 내가 찾고자 할 때 행복도, 고통도, 그곳에 있다.


<계절의 이유>, 짧은 여행에서 찾은 것, p.86


 

책의 저자인 고은 역시 부모님과의 이별을 겪은 후 행복과 슬픔이 삶 속에 함께 머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책 속 문장을 읽으며 나는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던 겨울이 떠올랐다. 당시의 나는 슬픔 외의 감정을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새하얀 설원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꼈던 순간마저도 애도의 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뒤늦게 해본다. 삶이 단순히 행복과 슬픔으로 나뉘지 않듯, 서로 다른 감정들은 때로 한 마음 안에서 공존하며 우리를 다음 시간으로 이끌어 가니까.


이처럼 작가는 빛나는 계절의 장면들만을 엮어내지 않는다. 그래서 고은의 문장은 더욱 진솔하게 다가온다. 간직하고 싶은 기억뿐 아니라 쉽게 꺼내기 어려운 상실과 슬픔까지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렇기에 책장을 넘기다 보면 자연스레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나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었던 계절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시간을 어떻게 흘려보내며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말이다.

 

그렇게 책 <계절의 이유>는 지나온 계절들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계절을 맞이할 자신만의 방법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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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후 다시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여전히 뜨겁고 습한 공기에 지치기도 하지만, 그 사이 문득 선선한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길 위에는 매미 한 마리가 뒤집어진 채 말라 있고, 나뭇잎들은 벌써 노란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이 흔적들은 비극이 아니라, 가장 뜨거웠던 시간을 갈무리하는 다정한 작별 인사였다. 곧 가을이 올 것이다.


<계절의 이유>, 다정한 작별 인사, p.143

 

 

누군가에게는 상실의 계절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환희의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은 우리를 한곳에 머물게 두는 법이 없다. 시간이 흐르면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다음 계절로 건너가야 한다. 어느 계절도 영원하지 않기에, 지금 이 순간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생각했다.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았던 슬픔과 아쉬움, 그리고 나를 찾아왔던 행복까지도 모두 내 삶을 이루던 계절이었음을. 그러니 나도 지나온 모든 계절의 장면에게 손을 흔들어 본다.

 

그 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나 역시 지나온 계절에게 다정한 작별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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