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생명, 그리고 영생에 관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인간이 오랫동안 던져온 질문이다. 과학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오늘날, 특히 예술 작품들은 인간의 신체와 영생에 관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연극 ‘모어 라이프’ 역시 인공 신체를 통해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일이 가능해진 40년 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이에 관한 여러 질문을 제시하는 작품이다.

연극은 2026년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은 브리짓이 40년 뒤 미래에서 새로운 인공 신체를 통해 삶을 살아가게 되며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브리짓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한 뒤, 남편 헨리는 혹시 모를 가능성을 믿고 브리짓의 뇌 데이터를 실험에 제공한다. 그리고 40년 뒤, 프로젝트가 실제로 성공하며 브리짓은 다시 눈을 뜨게 된다.
1막은 브리짓이 자신이 죽었다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브리짓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빅터 박사와 조수 마이크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갑작스럽게 자신이 이미 교통사고로 죽었고, 그 사이에 4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브리짓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애초에 브리짓은 살아생전 실험에 동의한 적도 없었기에, 더욱 감정적으로 동요한다. 브리짓은 빅터를 의심하며 지금쯤 노인이 되어 있을 남편을 데려와 달라고 계속해서 요구하나, 빅터는 그때마다 브리짓의 기억을 리셋시키며 브리짓이 완전히 자신에게 순응할 때까지 연구를 강행한다.
브리짓과 함께 1막의 핵심 인물인 빅터와 마이크는 인간을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두고 충돌한다. 마이크는 엄연한 인간인 브리짓을 실험체처럼 대하는 빅터를 비판하지만, 빅터는 브리짓밖에 성공 사례가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발전을 위해서는 연구를 멈출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한다. 한편, 브리지트의 남편 헨리는 실험실 바깥에서 브리짓을 지켜보며, 과연 눈앞의 존재가 이전의 브리짓과 동일한 사람일지 고민한다.
결국 바깥의 상황을 눈치챈 브리짓은 다시 한번 빅터에게 자신을 보내 달라고 요구하고, 결국 빅터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며 탈출을 강행한다. 그렇게 기술을 통한 인간의 부활을 중심으로, 여러 윤리적 문제와 그에 따른 여러 질문을 제시하는 1막은 마무리된다. 이어지는 2막에서는 이러한 질문을 보다 사적인 영역으로 옮겨 와 이야기를 진행한다. 브리짓이 남편 헨리, 그리고 헨리가 재혼한 상대 다비나와 함께 지내는 모습을 통해 거대한 담론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다양한 입장을 가진 개인들을 비춘다.
노화를 늦추는 시술을 받은 헨리는 여전히 젊은 외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40년 전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브리짓에게 그는 더 이상 과거의 남편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브리짓은 시간이 흘러 자신과의 기억을 거의 잊은 헨리의 모습에 당혹스러움과 불쾌감을 느끼고, 헨리는 여전히 브리짓이 정말로 자신이 아는 브리짓이 맞을지 의심한다. 브리짓은 시간이 흘러 너무나도 달라진 관계를 견디지 못한다.
한편, 헨리와 같은 시술을 받은 다비나는 브리짓의 새로운 젊은 육체를 부러워한다. 자신을 혹독하게 관리하면서도 결국 닥쳐올 노화와 죽음을 두려워하는 다비나는, 영생을 원치 않았던 브리짓과는 대척점에 놓이는 인물이다.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모습 사이에서 갈등하던 브리짓은 결국 집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찾아온 빅터에 의해 실험실로 옮겨진다.
앞서 빅터의 실험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마이크는 이후 적극적으로 브리짓과 같은 인공 신체 부활 기술을 막고자 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 브리짓에게 인공 신체의 작동을 멈출 수 있는 권한을 건네주지만, 브리짓은 죽음을 선택하는 대신 사람들 앞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길을 택한다. 그렇게 브리짓은 최초의 사례로 남아, 오랫동안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묘사된다. 다른 인물들 역시 각자의 입장에 따른 결말을 맞는다. 인공 신체 수술을 선택한 사람도, 마이크처럼 거부한 사람도 존재한다. 작품은 어느 한쪽의 입장을 단정적으로 제시하기보다, 그 질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과 어긋난다. 브리짓은 기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나 육체는 미래에 존재하고, 헨리는 육체는 젊지만 과거의 감각과 기억을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다비나는 젊음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누구보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결국 ‘모어 라이프’는 단순히 영생의 문제를 묻는 것만이 아닌, 무엇이 한 인간을 동일한 존재로 남게 하는가를 질문하는 작품처럼 보인다. 기억인지, 육체인지, 혹은 시간을 함께 통과해 온 경험인지에 관한 질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반복된다.

연극 '모어 라이프' 빈무대 사진
3시간에 달하는 긴 호흡 속에서 미래와 인간의 생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다룬다는 점은 필연적으로 현재의 관객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요구한다. ‘모어 라이프’는 관객이 더 쉽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도록 코러스를 활용해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를 연결한다. 코러스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 하나의 이야기임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동시에, 관객이 극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들을 제시한다. 등장인물의 상태를 설명하거나 여러 역할을 오가며 브리짓의 신체에 대한 부분 등 여러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장치는 미래의 이야기를 현재와 이으며, 관객이 작품과 계속해서 연결될 수 있도록 한다.
긴 러닝타임 속에서도 관객과 끊임없이 호흡하며 이야기에 몰입하게 만드는 고민의 흔적들은 분명 인상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이 따라가기에는 다소 벅찬 순간들 역시 존재했다. 작품이 수많은 질문을 쉼 없이 제시하는 데 비해,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된다. 다양하게 주어지는 질문의 양 자체가 문제가 아닌, 관객에게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다음 내용이 이어지다 보니 관객이 충분히 사유할 여유가 부족하다.
극 중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프랑켄슈타인’의 인용 역시 다소 아쉽게 느껴진다. 갈바니즘과 같은 초기 인류 신체에 관한 연구를 보여주며, 브리짓과 빅터의 관계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장치이다. 그러나 반복되는 인용은 그보다는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한 장치처럼 기능하는 면이 있었고, 이미 많은 정보를 따라가야 하는 관객에게 인용은 작품에 관한 생각을 깊게 만드는 상징보다는 오히려 피로감을 높이는 장치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럼에도 ‘모어 라이프’의 영생이라는 거대한 SF적 상상력을 인간 개개인의 감정과 삶의 측면에서 이야기로 풀어나간다는 이야기는 기술의 발전이 눈에 띄게 이루어지는 지금 시대에 의미가 있다. 작품은 기술의 발전 자체를 단순히 낙관하거나 비관하는 것이 아닌, 대신 변화한 세계 속에서 여전히 다른 입장으로 충돌하고, 여러 감정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을 비춘다. 결국 연극은 수많은 변화 후에도 계속 인간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