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부댕전 - 순간의 미학, 빛의 탐구
2026.04.11~2026.06.21

한동안 일본 여행을 갈 때마다 미술관에 다녀왔는데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의무처럼 느껴져서 내려놓기로 했다.
이번 여행에는 비는 시간이 생겨서 동선에 맞춰 전시 몇 개를 추렸다. 늘 그렇듯 '한국에서 개인전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전시 위주로 살폈고, 그날의 선택을 받은 건 SOMPO 미술관에서 열리는 '외젠 부댕'의 전시였다.
솜포 미술관은 처음이었는데 고흐의 해바라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복잡하기로 유명한 신주쿠지만 서쪽 출구 방면으로 이동해 N4 출구로 나오면 금방 미술관을 발견할 수 있다.
열차에서 내려서 출구까지 거리가 멀어 지하철 출구라고 불러도 되나 싶게 오래 걷지만 지하 통로로 연결되어 있어서 길을 잃을 위험은 상대적으로 적다.

찾았다. 솜포 미술관.
외젠 부댕은 인상파의 선구자, 모네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이 유명하지 않을까. 일본에서 모네 전시가 굉장히 인기를 끌고 있어서 모네의 스승이라고 외젠 부댕 전시를 홍보하거나 소개하는데 항구 마을에서 자란 해양 화가로도 불리고, 바다 못지않게 하늘을 아름답게 그리는 '하늘의 왕'이기도 하다.

[전시 개요]
- SOMPO 미술관 개관 50주년 기념, 30년 만의 일본에서의 외젠 부댕 회고전
- 프랑스 근대의 풍경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부댕의 작품 중 유화, 소묘, 판화를 포함하여 총 100여 점 이상으로 구성
- 순간적인 빛과 색채를 포착한 외광파의 대가, 인상주의의 아버지인 외젠 부댕의 작품을 인물과 건축까지 확장하여 새로운 관점을 시사
[전시 구성]
바다 풍경 - 해양 화가의 탄생
하늘 - 찰나의 미학, 빛의 탐구
소묘 - 나무, 하늘, 배, 바다 : 본질을 포착하다
풍경 - 바르비종파의 유산
건축 - 여행하는 화가가 본 풍경
동물 - 친숙한 대상 바라보기
인물 - 야외의 군상 표현
인물 연구
판화 - 이미지의 전파
전시는 5층부터 3층까지 이어지며, 5층에 전시된 작품에 한해 촬영이 가능하다. 별도의 오디오 가이드가 제공되지 않지만 작품 캡션과 함께 설명을 곁들여둬서 이해를 돕고 있었다.
미술관에 여러 차례 다니고 있지만 일본어보다는 영어가 익숙한데 영문 설명은 없었기에 사전 검색을 통해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전시를 관람했다. 어설픈 합리화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설명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느끼는 것도 괜찮은 관람 방식이라 생각한다.
유일하게 사진 촬영이 가능한 첫 섹션은 '해경'으로 외젠 부댕이 해양 화가로 활약했던 시기를 담고 있다.


시선을 사로잡은 작품들은 르 아브르 항구의 모습이었다.
무역팀에서 일하다 보니 유럽의 항구 이름을 익히게 되는데 그중 한 곳이 프랑스의 르 아브르. 나에게는 거대하고 번화한 항구인데 외젠 부댕의 그림에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19세기의 모습이 담겨있었다. 증기선, 범선, 돛을 달고 있는 작은 배까지 모르지만 아는 곳, 알지만 모르는 곳이었다.
인상 깊었던 작품을 소개해 본다.

부두의 범선, 1885-1890년, 판에 유채
1880년대 이후, 부댕은 돛에 닿는 빛의 효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두 척의 범선을 그린 이 작품은 세로 구도를 통해 우뚝 솟은 마스트를 강조하며, 햇빛을 받은 흰 돛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작은 습작이지만, 애매한 경계 속에서 녹아드는 듯한 하늘과 수면, 그리고 그 위에 있는 배의 돛이 이 시기의 부단의 관심사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19세기 말이 되면서 범선은 점차 사라지고, 동력을 가진 기계선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1893년, 트루빌에 체류 중이던 부댕은 지인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범선의 느린 소멸’ 은 바다를 너무나도 단조롭게 만든다.
일흔의 나이를 앞두고, 자신의 중요한 예술적 주제가 사라져 가는 현실을 마주한 그 말들은 20세기를 눈앞에 둔 시대의 큰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옹플뢰르, 항구, 아침 효과', 1896-1897년, 캔버스에 유채
아침의 부드러운 빛에 감싸인 조용한 항구 풍경을 그려냈다.
해안가에는 정박 중인 요트와 범선, 혹은 증기선이 늘어서 있고, 뒤편으로는 배들의 실루엣을 따라가듯 산의 능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린다. 다소 단단한 질감의 세로로 긴 스트로크를 종횡하듯 움직이는 붓의 터치는 각각의 모티프 형태를 모호하게 만드는 반면, 일렁이는 수면과 흐린 하늘에 퍼지는 흐릿한 햇빛의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하고 있다. 평행하게 배열된 여러 붓터치는 간결한 표현 속에도 수면에 반사되는 배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낸다.
한편으로는 화면 상단에서 흰색, 회색, 하늘색, 분홍빛 섞인 회색으로 구름이 유유히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한다. 새벽녘 빛에 의해 하늘과 수면, 그리고 항구가 하나가 되는 순간을 포착한 이 작품은, 화가 사후 1899년 3월에 열린 경매에 아마도 117번으로 출품되어 260프랑에 낙찰되었다.

부댕의 작품은 찰나를 붙잡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세밀한 시선과 거친 터치는 금방이라도 바람이 불고 그림자가 이동하고 피사체가 움직일 것만 같았다. 순간을 붙잡아 화폭에 담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일상을 야외에서 실시간으로 포착하여 극적인 요소 없이도 감각적으로 담아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풍경 한 장면이 그대로 갇혀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