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그의 작품들 중 흔히 <햄릿>, <리어왕>, <맥베스>, <오셀로>가 ‘셰익스피어 4대 비극’으로 분류되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어쩌면 그들보다도 더 익숙한, 다섯 번째 비극이 있다. 바로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지난 3월 24일 <로미오와 줄리엣> 뮤지컬 공연이 한전아트센터에서 막을 올렸다. 이 공연은 2001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을 올린 뒤 유럽 관객을 무려 500만 명 동원한 대기록을 가진 유명 뮤지컬이다. 이후 2009년에는 한국에 내한해 10만여 명의 관객을 모으기도 했다. 이번에 열리는 뮤지컬은 바로 그런 원작을 프랑스 제작진의 검수를 받아 제작한 오리지널 라이선스 공연으로, 5월 31일까지 상연될 예정이다.
로미오 역은 김희재, 유회승(N.FLYING), 우빈(크래비티), 뉴(더보이즈) 배우가, 줄리엣 역은 송은혜, 장혜린 배우가 맡았다. 또 6인의 전문 댄서와 24인의 앙상블이 합류해 화려한 퍼포먼스와 절도 있는 군무로 함께 무대를 꾸민다.
내가 관람한 회차에는 우빈(로미오), 송은혜(줄리엣), 김대식(벤볼리오), 이재진(머큐시오), 김순택(티볼트) 배우가 출연했다.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의 시놉시스는 이와 같다.
아름다운 도시 베로나는 몬테규와 캐퓰릿 두 강대 가문이 이끌어 나가는 곳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두 가문이 오랜 갈등의 역사로 인해 서로를 미워하는 원수 사이라는 것. 몬테규 가문의 아들 로미오와 캐퓰릿 가문의 딸 줄리엣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자신들을 둘러싼 어른들의 복잡한 사정으로 위험에 빠지고, 어린 연인은 죽음을 각오한 사랑을 이어간다.
공연장의 불이 꺼지고 커튼이 걷히기 시작할 때, 기대감으로 부푼 마음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것은 걱정이었다. 이번 공연이 내가 경험하는 첫 뮤지컬이라 혹여 극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할까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미 스토리가 익숙한 <로미오와 줄리엣>을 첫 뮤지컬로 감상하게 된 것이 예상치 못한 행운이라고 생각되기도 했다.
하지만 배우들과 댄서, 앙상블이 등장하고 첫 곡이 공연장을 가득 메우자마자 곧바로 불필요한 걱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음악은 웅장하면서도 풍부했고, 가사는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번안된 덕분에 의미나 그 속에 담긴 감정이 분명하게 와닿았다. 주연, 조연 따질 것 없이 모든 배우들의 연기 역시, 마치 실제 존재했던 베로나의 한때를 영상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했다. ‘어서 와, 여기는 베로나.’ 극의 시작과 함께 멜로디를 타고 울려 퍼지는 앙상블의 합창이 나와 관객들의 마음을 단번에 앗아갔다.
예상치 못하게 무척 인상 깊었던 부분은 조명과 세트였다. 공원, 광장, 건물, 성당 등 극 중에 필요한 장소들이 그때그때 마법처럼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예를 들어 성당이라면 뾰족한 첨탑과 스테인글라스 창문을 배치하는 식으로, 실제 도시를 축소해 옮겨놓은 것처럼 정교하면서도 불필요한 부분은 덜어내고 해당 장소를 표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포인트들만 짚어 표현한 것이 마치 캐리커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연출진이 어둠에 몸을 숨기고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세트를 등장시키면, 그곳에 큐 사인을 주는 것은 조명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명이 한 작품 내에서 얼마만큼의 영향을 끼치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공연장의 뒤편에서 쏘아지는 빛의 색, 조명의 세기, 그림자를 조절하는 각도 등을 모두 컨트롤하는 세밀한 솜씨를 지켜보는 것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집중해야 하는 위치를 향해 고요한 장면일 때는 흰색 조명을, 급박한 장면일 때는 붉은색 조명을 비추고, 휘몰아치는 장면일 때는 흑백의 점멸을. 관객들에게 무대의 어느 곳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멀리서 지시해주는 지휘자 같은 존재였다.
흔히 연극이나 오페라, 뮤지컬과 같은 장르를 ‘종합 예술’이라고 일컫는다. 나 역시 이론적으로는 그렇게 배웠지만, 그 말을 체감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 극의 한정된 무대 공간 위를 조금의 틈 없이 가득 메우는 노래, 춤, 군무, 세트, 조명, 그리고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위치로 움직이는 연출이나 배우가 관객과 소통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처음으로 ‘종합 예술’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
<로미오와 줄리엣>은 흔히 두 주인공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요약된다. 하지만 그 속에 숨은 본질은 ‘다름’이다. 몬테규 가문과 캐퓰릿 가문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원수 사이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고, 상대방과 조금이라도 섞이는 것은 치를 떨 정도로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이 기이할 정도로 집착적인 증오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당장은 아무 일이 없어도 모두가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고, 이제는 그게 당연한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목적 없는, 단순히 증오를 위한 증오. 극의 중간중간 인물들 역시 독백한다. 사실은 줄리엣이 가문의 복잡한 문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졌으면 하고, 로미오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하지만 속으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상 서로를 마주하면 그들은 습관적인 미움을 쏟아내기 바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곳에서 단순한 연인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에게 당연시되던 악의 굴레를 처음으로 끊어낸 상징적인 존재들이다. 남들과 처음으로 ‘달라지는’ 존재들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눈에 띈다. 어린 연인의 결말이 안타깝게도 비극이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의 끝은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두 가문 사이의 감정의 골이 조금이라도 얕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으리라. 하지만 몬테규와 캐퓰릿의 증오는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 깊고 단단했고, 그것을 잘라내야 하는 운명을 부여받은 어린 연인은 그만큼 큰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17년 만에 돌아온 이번 <로미오와 줄리엣> 뮤지컬은 이러한 복잡하면서도 가슴 아픈 이야기를 예술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풀어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만큼 훨씬 세련되게 업그레이드된 공연이 5월 31일까지 한전아트센터에서 상연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