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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반쪽"


흔히 사랑에 관하여, '두 사람이 만나 하나가 된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사랑은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고 서로 보완하는 과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누군가를 만나 하나가 되어야만 완벽해진다면, 사랑하기 전의 우리는 그저 불완전한 '반쪽짜리' 사람일까?

 

 

 

일과 이분의 일


 

 

 

오래된 명곡이지만 아주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 1994년에 발매된 투투의 데뷔곡 <일과 이분의 일>이다. 처음에는 레게풍의 분위기와 보컬 김지훈의 풋풋하고 청량한 목소리에 빠졌지만, 흥겨운 리듬 뒤 아리송한 가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 안에는 사랑에 대한 결핍과 씁쓸한 은유가 숨어있었는데, 해석의 폭이 넓어 듣는 이마다 의견이 미묘하게 갈리기도 한다.

 

 

멀리서 널 보았을 때

다른 길로 갈까 생각했는데

변한 듯한 널 보고 싶고

짧은 인사할까 하는 마음에

 

두근대는 가슴으로 한 걸음씩 갈 때

네 어깨 손 올리는 다른 어떤 사람

화가 난 네 얼굴은 미소로 바뀌고

두 사람은 내 옆을 지나갔지


 

노래 속 화자는 우연히 길에서 전 연인을 마주친다. 모른 척하고 지나갈까 잠시 고민하다가 짧은 인사라도 건넬 마음으로 다가가지만, 그녀의 어깨에는 이미 다른 사람의 손이 올려져 있다. 화자는 자신을 떠난 연인이 새로운 사람과 다정하게 '둘'이 되어 지나가는 모습에 이렇게 탄식한다.

 

 

둘이 되어버린 날 잊은 것 같은 너의 모습에

하나일 때보다 난 외롭고 허전해

네가 가져간 나의 반쪽 때문인가

그래서 넌 둘이 될 수 있었던 거야

 

 

가사를 토대로 해석을 해보자면, 화자와 전 연인은 사랑하던 시절 서로에게 반쪽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헤어지고 나서 화자는 자신의 반쪽을 돌려받지 못했고, 결국 반쪽짜리 사람으로서 외롭고 허전하게 남겨진 것이다. 반면 그녀는 내 반쪽을 흡수해 풍요로워졌기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 너무나 쉽게 완벽한 '둘'이 될 수 있었다.


 

지금 너에겐 변명처럼 들리겠지

널 보낸 후 항상 난 혼자였는데

 

 

그러다 흥미롭게도, 뒷부분에 나오는 단 두 소절 여자의 파트에서는 곁에 있던 사람이 연인이 아니라 남자의 단순한 오해였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어떨까. 어쩌면 여자 역시 사랑이 끝난 후 스스로를 잃어버린 불완전한 상태가 되어, 겉으로는 새로운 만남을 가져도 내면은 늘 허전하고 혼자인 것처럼 느꼈을 수도 있다.


타인에게 나의 반쪽을 떼어주고 상대를 통해 나를 완성하려는 낭만적인 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별 앞에서 지독한 결핍을 낳는다. 나의 반쪽을 누군가에게 의탁하려는 순간, 우리는 홀로 설 수 없는 위태로운 존재가 된다.

 

 

 

사랑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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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내 빈자리를 채워줄 잃어버린 반쪽을 평생토록 찾아 헤매야만 할까? 이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 더 깊고 강렬한 대답을 영화 《헤드윅》에서 마주하게 되었다.

 

《헤드윅》은 잃어버린 반쪽을 위한 여정이다. 영화의 메인 테마곡이라고도 볼 수 있는 < Origin of love >는 플라톤의 향연 속 등장하는 신화를 빌려 사랑을 정의한다. 본래 인간은 '남-남', '여-여', '남-녀'로 붙어있던 완벽한 존재였으나 신의 분노를 사 반으로 쪼개졌고, 그 갈라진 상처인 배꼽을 안은 채 사랑을 위해 평생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신화는 곧 주인공 헤드윅이 가진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자 신앙이 되었다. 동베를린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녀는 불완전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장벽 너머의 자유를 갈망하며, 자신의 텅 빈 반쪽을 채워줄 완벽한 타인을 끊임없이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슈가대디인 미군 루터를 만나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받고 장벽을 넘어 기꺼이 고향과 성(性)을 버렸다. 또한 제자이자 연인인 토미 노시스에게 자신의 전부인 음악과 영혼을 아낌없이 쏟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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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타인을 통해 완벽한 하나가 되려 했던 시도는 매번 참담한 배신과 실패로 끝나버렸다. 그들은 헤드윅의 반쪽을 채워주기는커녕 그녀가 가진 것마저 빼앗아 떠나버렸다. 그것은 헤드윅이 만든 음악과, 자신이 온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믿었으며 끝없이 갈망하던 '사랑'이었다.


끝없는 배신과 상실 끝에 헤드윅은 자신을 옭아매던 신념을 스스로 깬다.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의미하던 화려한 가발과 진한 화장을 벗어던지고, 남성도 여성도 아닌 흉측한 상처인 '성난 일 인치'를 가진 맨몸의 자신을 온전히 똑바로 마주한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반쪽이 아니라, 상처를 가졌지만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한 '나'를 수용하게 된 것이다.


헤드윅이 스스로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을 위해 통제하려 했던 대상인 남편 이츠학의 본연의 모습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핍된 나'는 타인을 내 빈자리를 채울 부속품으로 여기지만, '온전한 나'는 타인 역시 억압하지 않고 모습 그대로를 존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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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나의 결핍을 완전히 채워주는 '반쪽'이 될 수 없다. 나를 완성하는 퍼즐, 즉 '잃어버린 반쪽'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한다. 헤드윅이 썼던 무거운 가발처럼 우리는 종종 사랑받기 위해, 혹은 사회의 정상성에 맞춰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거나 규정하려 든다. 하지만 다른 이의 기준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며 스스로를 '반쪽짜리 인간'으로 치부하지 말자. 타인은 진정한 나를 정의해줄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는 신화 속의 가여운 존재가 아니다. 성난 일 인치를 안고 살아갈지언정,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하고 독립적인 세계다. 내가 온전한 '1'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또 다른 '1'을 만날 수 있다. 건강한 연대와 사랑은 반쪽을 찾는 애처로운 구걸이 아닌, 꽉 찬 두 세계의 자유롭고 찬란한 충돌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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