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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첫 번째 일화이다. 얼마 전 SNS에서 본 이야기이다. 회사 면접에서, ChatGPT에 ‘지금까지 나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나의 특성과 역량을 판단해 줘’라는 프롬프트를 입력하고, 그 결과를 면접관들에게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제 지원자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지피티와의 기록’이 사용되는 시대가 왔다.

   

두 번째 일화이다. 나는 TV를 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자꾸 요금이 청구된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센터에 전화해 보니 우리 집에 셋톱박스가 있단다, 신호가 잡힌단다. 그러면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만 한다. 해줄 수 있는 게 왜 없는가, 직접 우리 집에 와서 셋톱박스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면 될 것을.

 

이 두 일화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행동 양식을 가진 사람인지를 ‘기록’을 통해 판단한다는 점이다. 살면서 모두 한 번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직접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하면 될 일을, 기술과 절차와 역할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일을. ‘진실한 나’와 ‘기록된 나’ 간의 괴리가 생기는 경험을. 연극 <셋톱박스>는 현대인이 경험하는,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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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는 TV를 안 본다니까요…”


 

작중 주인공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직장에서는 윗사람과 그 윗사람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바람에 매일 야근을 한다. 결혼 준비도 병행한다. 사랑하는 여자친구지만, 일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결혼 준비에 충실한 좋은 예비 신랑 노릇을 하기란 쉽지 않다. 몸도 좋지 않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에 있다는 셋톱박스 때문에 TV 요금이 청구되고 있다. 콜센터에도 전화를 해 보고, 대리점에도 문의해 보지만, 반복해서 들리는 건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라는 말이다. 복통은 점점 심해져만 가고, 결국 주인공은 병원을 찾는다. 병원에서는 주인공의 배 속에 ‘똥’이 꽉 들어차 있다고 말한다. 이 ‘똥’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주인공은 이 ‘똥’을 끝내 배설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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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설의 가능성을 논하기 전에, 그의 뱃속에 들어찬 ‘똥’은 대체 어떤 이유에서 생겨난 것일까? 그것은 그가 스스로 그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자기 모습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기록 때문에, 그는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며, 그것을 제대로 정정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셋톱박스’라는 기술로 인한 ‘기록된 나’와 ‘진실한 나’ 간의 괴리가 작중 대표되는 문제이기는 하지만, 주인공이 겪는 이 괴리감은 기술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많은 역할이 주어진다. 회사에서는 ‘대리’라는 직급으로, 여자친구에게는 ‘오빠’라는 애인으로, 병원에서는 ‘환자분’, 그리고 고객센터에서는 ‘고객님’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 중 진정으로 그가 느끼는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은 없다. 그 역할을 수행하는 동안, ‘진실한 나’의 영역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어쩌면 우리 모두의 이야기


 

‘남자’가 겪은 이 일이, 작품의 창작자인 김승철 작가의 실화라는 점에서, 연극 <셋톱박스>가 다루고 있는 문제는 우리의 실제적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기록으로 판단된다. 팬데믹 이후 기술 의존도가 높아지며 이 경향성은 더 심해졌다.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시스템은 기록을 근거로 존재를 판단하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종종 ‘기록 밖의 나’의 존재를 증명하느라 애를 써야 한다.

 

우리 각자의 뱃속에도 조금씩 ‘배설되지 못한 것’이 쌓여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중 남자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대상인 상사와 여자친구, 혹은 상담 직원의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단단해져 몸 어딘가를 압박한다. <셋톱박스>는 그 답답함을 과장과 유머로 비틀어 보여 주지만, 웃음 끝에 남는 질문은 묵직하다. 우리는 과연, 자신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뱃속에 가득 들어찬 이 똥을 과연 배설할 수 있을까?

 

연극이 끝난 뒤, 우리는 다시 각자의 역할로 돌아간다. 우리 사회는 코로나 이후 기록과 기술에 더더욱 의존한다.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넘어, 기술과 기록을 넘어, 진정한 서로를 바라보고 진정한 정체성을 보일 수 있는 순간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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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좋아합니다. 폭넓은 문화 향유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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