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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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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을 죄다 뒤집어쓸 때면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인다. 지인의 인스타에 올라온 에펠탑 사진. 친구가 들고 다니는 명품 가방. 아르바이트를 안 해도 여유롭게 생활하는 대학 동기를 보며 약간의 질투와 허탈함을 느꼈다. 행복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내 몫의 행운이 길 잃은 기분이 들 때면 꼭 중고서점을 찾는데, 얼마 전에 들른 곳에서 시선을 잡아끄는 책을 발견했다.


'더러운 나의 불행 너에게 덜어줄게.'

 

프랑스 작가 마르텡 파주가 쓴 청소년 성장소설로, 원제는 'Le club des inadaptes(부적응자 클럽)'이다. 이야기는 중학교 생활에 녹아들지 못하고 겉도는 네 명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주인공과 친구 에르완, 프레드, 바카리는 자신들을 부적응자 클럽 회원이라 부른다.


에르완이 동급생한테 흠씬 두들겨 맞으며 불행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바카리의 아빠가 실직하고,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학 선생님이 학교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받는다. 아이들은 분개하며 교장 선생님한테 편지를 써 항의하지만, 돌아오는 건 부모님 호출이다.


어른들 눈엔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 별일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일 안 하고 공부만 하면 되는데 뭐가 힘드냐.'라고들 이야기하지만, 당장 나의 학창 시절만 돌이켜 봐도 서바이벌 게임을 하듯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마치 하트가 하나만 주어진 게임에서 매 순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무작위로 모인 열댓 명의 아이 중 1년간 함께 밥을 먹고 조별 과제를 할 친구를 탐색해야 하는 과정이 큰 스트레스였다. 진실한 우정이라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혼자 다니는 게 싫어서 무리에 속하기 위해 애쓰면서 성적까지 챙겨야 했다.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적응자 클럽 아이들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난에 좌절한다. 그러던 중, 에르완이 엄청난 걸 발명했다며 아이들을 차고로 불러들인다.

 

 

'불행을 평등하게 나눠주는 기계를 발명하고 있어. 맨날 똑같은 사람만 불행하지 않도록 말이지.'

 

 

발명품은 '왜 맨날 같은 사람만 불행해야 하냐?'는 질문을 통해 만들어졌다. 행복한 아이들이 불행해지고, 불행한 우리가 행복해질 거라는 에르완은 이름하여 '평등기계'를 개발한 것이다.


에르완은 왜 타인의 고통을 빌 만큼 잔인해진 걸까. 과연 불행을 나누는 것이 정말 공평하고 정의로운 일일까?

 

에르완을 때린 학교 폭력 가해자, 아이들의 마음을 몰라주는 교장 선생님처럼 우리네 삶에도 골탕 먹이고 싶은 인간이 한 두명씩 있을 거다. 그러나 막상 저주가 통하면 죄책감을 느끼곤 한다. 사람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본능적으로 공감하고,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믿고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기계의 빨간 버튼을 누르자, 늘 웃고 있던 친구가 크게 다쳐 병원에 실려 가고, 악의 축처럼 느껴졌던 교장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한다. 주인공은 죄책감에 떨다가 상담 선생님께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기계를 분해해보자 속이 텅 비어있고, 그럴싸한 소리를 내는 장치만 달려있었다.


사실 에르완은 '평등 기계' 따위 존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기간 무력감에 시달린 그는 통제감을 되찾고 싶었을 테고, 짓밟힌 자존감이 극단적인 상상으로 발현된 것이다. 에르완은 친구들과 함께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을 거라는 가능성을 품기 위해 몸부림친 게 아닐까? 다행히도 에르완은 모두가 공평해야 한다는 정의감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음을 깨닫는다.


'정의'는 때론 복수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이름이 되기도 한다. 만약 눈앞에 '평등 기계'가 있다면 혹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기계의 이름이 '평등'이기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하며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타인이 불행해짐으로써 그에게 가야 할 행복이 나에게 온다는 걸 알고도 버튼을 누른다면? 그건 그저 내가 다른 사람 위에 서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기계를 처분하고 나서도 부적응자 클럽은 계속된다. 그들에게 학교는 수수께끼같고 삶은 늘 고되지만, 그런데도 '행복'은 늘 곁에 있다는 걸 깨닫는다. 에르완은 세상에 없는 걸 내놓으며 즐거워했고, 바카리는 수학 문제를 풀며 웃었다. 프레드는 전자 기타를 칠 때 빛이 났다. 주인공은 강한 남자가 되기 위해 매일 달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성장담을 통해 나는 행복이 내 손을 떠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어디에 두고 온 것도 아니며 그러니 잃어버린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잊고 지냈을 뿐이다. 부적응자 클럽 아이들은 소위 인싸무리도 아니고 성적이 우수하지 않다. 선생님들의 예쁨을 한 몸에 받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각자 좋아하는 일이 있고, 이루고 싶은 목표가 존재한다. 그러니 무수히 닥쳐온 불행에도 스스로를 변호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거다. 나 또한 힘겨웠던 열네 살을 독서와 글쓰기로 버텼듯이 말이다.


잃은 것과 잊은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잃어버린 건 정말 내 손을 떠난 것이지만, '잊은 것'은 내 손안에 들려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한 거다. 

 

평등 기계가 그저 상징에 불과했기에 반 친구가 다리를 접질리고, 교장 선생님이 교통사고를 당한 것은 우연의 일치이자 그들 개인의 고통이었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온전히 행복한 사람은 없기에, 겉으로 보여지는 타인의 삶과 내 삶을 비교하는 건 무의미하다.


타인의 성공이 내 삶의 기준이라면 우리는 금세 꺾이고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타인이 기준이 되는 순간 남의 행복에 배 아파하느라 나 자신을 돌아보며 가꿀 시간을 놓치기 때문이다. 버튼을 누르지 않는 선택을 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잊고 있던 진정한 행복을 되찾을 수 있을 거다.


잘 먹고, 잘 웃고, 잘 자는 일처럼 사소한 순간들 속에 행복이 있다. 그 순간을 알아차릴 때, 더러운 불행이 조금씩 옅어질 것임을 잊지 말자. 그리고 기억하자. 행복은 빼앗아 얻는 게 아니라,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 내며 시작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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