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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희망이 없는 나날들에, 하루하루 힘든 나날들에 나를 붙잡아주는 것이, 빛나게 해주는 것이 나타난다면 현혹되기 쉽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나에게 오는 희망은 대부분 허상일 경우가 많다. 이 허상은 과연 독일까,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도구였던 것일까.


1930년대 일제 강점기 경성.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도 문학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과 소설가로 구성된 '칠인회'가 그들이다. 이 모임의 누구보다 문학에 진심인 두 사람의 편지가 잊지 못할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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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뮤지컬 <팬레터>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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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지망생 정세훈은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문학가의 꿈을 키우며 '히카루'라는 가명으로 활동한다. 그는 이미 천재 소설가로 평가받는 '김해진'과 편지를 주고받는다.

 

비슷한 아픔을 나누며 주고받는 편지. 천재 소설가 김해진을 향한 존경심으로 시작한 정세훈의 팬레터는 점점 복잡한 사랑의 형태로 발전한다. '칠인회'의 급사로 일하던 세훈은 우연히 모임의 새로운 일원으로 들어온 김해진을 만난다. 하지만 해진은 편지 속 '히카루'를 팬 이상으로 여자로 착각하고 있었으며, 사랑하고 있었다.

 

세훈은 실망할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이 팬레터 속 히카루를 진실로 만들기로. 19세 여성 작가로, 해진과 같은 병과 아픔을 가진 사람으로. 단단해진 서사 속에서 해진은 더욱 더 그녀에게 빠져든다. 보이지 않는 편지 속 사람에게 오직 그녀만을 향한 집착에 시달린다. 거짓을 만든 세훈 또한 이것을 진실로 만든다. 철저하게 구축한 사실들로 더 당당하게, 문학으로 해진의 세계를 채워나간다.


하지만 거짓말은 언제나 허점을 남긴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게, 의심하지 못하게 세훈은 히카루를 더 정교하게 만들어간다. 그리고 편지를 넘어 글 속에 해진을 가둔다. 해진은 더 이상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히카루와 소설 쓰기에만 전념한다. 결국 해진은 죽음에 이르고, 세훈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뒤늦게 깨닫는다.

 

 

 

별이 반짝이는 찰나의 시간, "히카루"



[팬레터] 공연사진_18 에녹_제공 라이브(주).jpg

 

 

히카루(ひかる)는 일본어로 '빛나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빛나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전구도 별도 언젠가는 빛을 잃어가지만, 사람들은 오로지 빛났던 찰나의 시간을 기억한다.


세훈에게 히카루는 아직 자신 없는 자신의 문학 실력에 비해 많은 기회를 열어주고,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을 해진에게 보일 수 있는 수단이었다. 해진에게는 매일 각혈로 얼마 남지 않은 수명에 고통받는 자신의 아픔을 유일하게 공감해주고, 편지로 현실을 도피할 수 있게 해주는 생명줄이었다. 그녀에게 편지를 받지 못할 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누구보다 절망했다. 몸은 병들어가도 그를 더 살게 하는 것은 히카루였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자신을 조금 더 살게 해준 것은 그 팬레터, 즉 히카루였다. 그래서 히카루가 누구든, 허울뿐인 희망이든 붙잡고 싶었을 것이다.

 

결국 해진은 몸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소설을 쓰게 된다. 하지만 그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잘못된 환상을 꿈꾸고 있었다는 것을. 글자로 만든 성 안에서 모든 것을 외면한 채, 자신의 아픔을 잊기 위해 그 환상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는 것을.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뮤지컬 <팬레터> 중, 해진의 편지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사회주의나 정치의식, 계급의식을 담기보다 '순수예술 추구'를 취지로 삼아 결성된 '구인회'라는 문학 문인 단체를 모티브로 했다. 이러한 배경은 작품의 주제와 깊이 맞닿아 있다. 세훈과 해진이 만든 허상 속 세계 역시 현실을 외면하고 오직 문학이라는 순수한 아름다움만을 추구한 것 아니었을까. 그들에게 산다는 것은 생명을 이어가는 것보다 글자로 써내려가는 세계가 악몽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끝을 버티게 해준 희망이었던 것이다.

 

거부할 수 없이 섬광을 쫓아가는 이야기, 10주년을 맞이한 뮤지컬 '팬레터'는 12월 5일부터 2026년 2월 22일까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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