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 1일에 발행된 『29.9세』는 12월 1일부터 31일까지, 시의적절한 31개의 장으로 채워져 있다.
1월에 읽은 게 조금 아쉽다. 이것이 내게 모자란 0.1일까…
12월 2일, 산문 - 슈톨렌
카페 통유리창 너머로 흩날리는 눈발을 본다. 단골 카페에는 올해 첫 슈톨렌이 개시되었다. 입자가 곱고 새하얀 슈거파우더로 둘러싸인 빵이 꼭 눈에 파묻혀 있던 걸 꺼낸 것 같다.
슈톨렌을 보면 반사적으로 안희연 시인의 슈톨렌이 떠오르는데, 그 시에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하는 친구가 나온다. 반려견이 죽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이 빵을 입에 넣고 맛있다고 말하고 밖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며 겨울을 만끽한다. 그러나 완성된 눈사람은 친구가 가진 그리움의 형상을 띠고 있다. 그리움도 눈사람처럼 천천히 녹는 성질의 감정일까? 언젠가 나도 참담한 마음을 겨우 일으켜보는 심정으로 눈사람을 만든 적이 있는데. 찰랑찰랑 고여 있던 그리움이 무섭게 불어나 거의 익사할 지경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는 그리움이 녹는 게 아니라 내가 녹아 그리움의 일부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게 고작 사 년 전이라는 걸 떠올리면 아연하다.
슈톨렌을 다 먹고 난 접시에는 슈거파우더와 빵 부스러기가 뒤섞여 있다. 누군가가 밟고 지나간 눈길처럼 지저분해 보인다. 겨울에 나는 화장한 얼굴보다는 화창한 얼굴이 좋고 슈거파우더는 저절로 녹지 않는다. 입김만 뱉어도 쉽게 흩어져버린다. 이런 것들이 뭔가를 깨닫게 하지는 않는다. 다만 슈톨렌을 먹고 난 뒤에는 연말이라고 꼭 한 해를 눈앞에서 깨끗이 치우기 위해 급급할 필요는 없구나 생각한다.
이전까지 내가 알던 설탕 맛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뭐랄까, 바닥에 닿아본 적 없는 눈처럼 맑고 투명한 단맛 같다.
그건 아마 내가 아끼던 그리움이 혀끝에서 녹아버렸기 때문이겠지. 처음을 아껴온 슈톨렌처럼.
- 고선경, 『29.9세』
어제는 서울에 눈이 내렸다. 내게 죽음을 연상시키는 진눈깨비가.
단짝친구의 장례식 마지막 날에는 그 해의 첫눈이 내렸다. 이틀 내내 눈물같이 비가 내려 낙엽을 적시더니, 모두가 장례식장을 떠나던 늦은 시간에는 갑자기 눈이 섞여 내리더라. 그 전에도 연말이라는 시간대를 그닥 아껴본 적은 없었다지만, 장례 이후로는 연말을 보낼 때마다, 눈이 내리는 걸 보게 될 때마다 정말이지 비참한 기분이 된다.
내 주위에 눈이 한가득 쌓여 질식사하든지, 눈이 녹는 걸 기다려 익사하든지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때는 그리움이 녹는 게 아니라 내가 녹아 그리움의 일부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슈거파우더는 언제 녹을까. 눈처럼 녹아 흔적도 없이, 깨끗이 사라지는 그리움이 아니라, 저절로는 녹지 않아 계속 흩어지기만 하는 슈거파우더 같은 그리움. 이 슈톨렌의 단맛을 나는 언제쯤 느낄 수 있을까.
그 처음을 아끼고 아껴 둔다. 지금이 아연해질 때까지.
29.9라는 숫자를 양적으로 이해하고 싶다. 고선경 작가가 30세가 되기 전 마지막 12월을 뜻하는 시간적 의미가 가장 눈에 띄지만, 막상 책을 읽으면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러니까 29.9는, 무언가 온전한 기분을 느끼기에 0.1이라는 양이 모자라는 상태를 상징하는 숫자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모자라는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 30이 되고 싶어 하는 30.1은 29.9와 같을 수도. 어쨌거나 30으로 온전히 완성되기에는 0.1만큼의 한 눈금을 다가가야 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선경 작가가 넘치게 둔 통증과, 구애와, 또 ‘죽어도 좋아’ 같은 감정이 바로 0.1이라는 양만큼의 공백이라면, 아마도 30세든, 31세든, 아무리 시간적 숫자가 늘어난대도 메워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감정들이 눈 녹듯이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우리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메워지지 않는 0.1이 있다면, 사라지지 않는 0.1이 있다면, 차라리 그 공백을 품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니까… 그토록 찾아 헤맨 0.1은 결국 내 안에 있었다, 라는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