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유치원이 마치자마자 친구의 손을 잡고 피아노 학원으로 향하던 기억이라든가, 초등학교 입학 축하 선물이라며 귀가한 나의 방에 자리 잡고 있던 그랜드 피아노라든가. 넘어져 다 까진 무릎으로 엉엉 울며 타고 있던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초조한 낯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엄마에게 폭 안겼던 9살의 기억도, 용돈을 모아 오빠와 함께 마련한 선물을 건네던 엄마의 생일날 기억도, 끝끝내 재입시에 성공했음을 알리던 그날의 기억도 모두 내 안에 섬세히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있는 한, 너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해 주듯이 나의 안에 굳건히.
어린 나는 그 기억들에 기대어 자랐다. 사랑을 알려 준 그 기억들은 다시 그 사랑을 베풀 줄 아는 나를 탄생시켰다. 다른 사람의 슬픔에, 고통에, 기쁨에, 행복에, 분노에 공감할 수 있는 나를. 슬퍼한다면 기꺼이 휴지를 건넬 줄 알고, 등어깨를 토닥일 수 있게. 고통에 몸부림 치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손을 내밀 수 있게.
행복감에 도취돼 기뻐한다면 진심 어린 박수와 환호를 보내고, 분노에는 앞을 차지하고 앉아 천천히 이야기를 들어 주며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게.
아직은 영이가 이 글을 못 읽겠지만 나중에 자라나서 아빠가 보내는 엽서를 읽겠지.
Merry Christmas!
내년에도 몸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거라.
늘 아빠, 엄마가 네 곁에서 지켜볼게.
2001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사랑하는 아빠가
영아!
벌써 백일이 된 날이구나.
늘 건강하고 아름다움과 사랑을 아는 예쁜 애기로 잘 자라거라.
이모가
어떤 잘못을 했을 때도 바로 반성하고 고쳐 나가는 너의 모습이 많이 예쁘단다.
우리 딸이 더 큰 세상에서 멋지고 예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할게.
우리 영이도 건강하고 착하게 항상 남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노력해 줘.
2010년 5월 16일 일요일
아빠의 편지 일부 발췌
내가 했던 말 중에 너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했던 거 기억나? 이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너의 주변 친구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너는 속이 깊은 사람이니까.
있잖아. 나는 항상 주변 사람을 의식하고, 무언가를 할 때 걱정이 많이 앞서고, 시도하기를 겁내는 사람이야. 근데 너를 보면 이루어 내고 싶은 게 있으면 해 내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아. 그게 너무 멋있어.
2022년
친구의 편지 일부 발췌
네가 나한테 "네 존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주고 싶어"라는 내용을 편지에 써 준 걸 보고 지금 나의 존재 가치를 생각하고 있는 나에겐 너의 말이 진짜 고마운 말이었어. 너도 나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야, 진심으로. 네가 앞으로 하는 일마다 우리가 오늘 산 네잎클로버처럼 좋은 행운들이 네 곁에 항상 있기를 바랄게. 나도 항상 네 곁에서 네 편이 되어 줄게!
2023년
친구의 편지 일부 발췌
흐르지 않길 바라는 시간을 나는 결코 붙잡을 수 없다는 걸 부쩍 깨닫는 요즈음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불현듯 감정이 치솟아 눈가가 뜨거워지곤 한다.
영영 이렇게 살 순 없는 걸까. 모든 시간에 충실할 자신이 있는데, 그 시간에 끝이라는 마침표 하나만 사라져 줄 순 없는 걸까.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기꺼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발 벗고 나설 테니까 이 기억을 영원히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새로이 만들어질 기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오늘의 나와는 또 사뭇 다른 나로서 맞이하게 될 새로운 기억들. 그렇기에 현재의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어리광은 뒤로 하고, 영원한 기억으로 현재의 시간을 내 안에 남겨 둘 예정이다. 시간은 영원할 수 없어도, 내 안의 기억은 영원할 것을 알기에.
나의 소중한 기억들을 향해 가사를 읊는다.
난 우리를 영영 잃지 않아. 너도 영영 그럴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