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일상을 똑 떼어 무대 위에 올려두면 어떨까. 마치 남극의 펭귄이 되어, 버스정류장의 번호 표지판이 되어, 기차역 한편의 CCTV가 된 듯 타인의 삶을 지켜보는 일. 연극 <터미널>은 바로 그런 시선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터미널>은 총 세 편의 단막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연극이다. 다소 아프고 거칠지만, 그래서 더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관객에게 조용히 다가온다. 각기 다른 인물들의 삶은 서로 닿아 있지 않은 듯 보이지만, 결국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하나의 결로 이어진다.

[펭귄]
“잊지만 않으면 잃어버리지 않아”
남극 기지에서 만난 석기와 미래. 두 사람은 과거 연극과 선후배 사이였지만 지금의 석기는 그 기억조차 희미하다. 아니, 어쩌면 희미해지길 바라는 쪽에 가깝다. 반면 미래는 여전히 과거를 붙잡고 살아간다. 하얀 빙하 위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두 사람은 각자 품고 있던 꿈과 상처를 마주한다.
끊임없이 꿈을 꺼내 들여다보는 사람과 애써 외면하는 사람. 그 사이의 간극은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간극 자체가 우리가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겪는 감정임을 이 작품은 담담하게 보여준다. 누구나 마음 한편에 묻어둔 쉽게 꺼내지 못하는 꿈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Love so sweet]
귀할 귀, 보배 진. 이름과 달리 한 번도 귀하게 살아보지 못한 여자, 오귀진. 그녀가 가족에게 받은 상처는 너무나 깊었고, 그 상처는 결국 또 다른 가족에게로 이어진다.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나버린 엄마와 모진 학대를 퍼붓는 아버지 사이에서 남동생을 키운 귀진. 그는 어느새 동생에게 누나이자 엄마가 되었다.
병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뒤 귀진은 남동생 지훈을 떠나려 한다. 그러나 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노한다. 그 모습을 보며 귀진은 말한다. 지금의 네 모습이 꼭 아버지를 닮았다고. 그 순간, 귀진은 비로소 자신을 위해 한 발짝 현실과 떨어진다.
비록 손을 내민 사람이 사기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조차 귀진은 울지 않는다. 누군가의 호의를 받으면 어떻게든 갚으려 애쓰는 사람. 마치 받아본 적이 없어 받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다. 그래서 귀진의 단단함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메리 크리스마스 오귀진.
[거짓말]
퇴근 시간의 서울역. 수많은 사람이 스쳐 가는 그곳에서 효주와 태현은 단 한 시간의 만남을 반복한다. 누군가는 서울로 출근하고, 누군가는 서울에서 출근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끌리지만, 이미 각자의 가정을 가진 상태다.
효주는 아이를 갖기 위해 인공수정을 시도하고 있었고, 태현은 생계를 위해 사람을 속이는 일을 반복해 온 영업사원이다. 죄책감과 외로움, 그리고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두 사람을 같은 자리에 머물게 한다.
서로에게 잠시 술 쉴 틈이 되어주던 두 사람은 결국 각자의 거짓말을 마주하게 된다. 위로라 믿었던 관계가 그 순간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만큼은 분명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흐려진 자리에서 그들이 나눈 감정이 가볍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터미널>은 거창한 메시지를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일상에서 애써 외면해 온 감정들을 조용히 꺼내어 마주 보게 만든다. 각자의 삶 속에서 잠시 멈춰 서게 하는 순간, 그리고 그 틈에서 마주하는 솔직한 자신.
누군가는 이 인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모두의 삶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선택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누군가의 일상을 똑 떼어 무대 위에 올려두면 어떨까. 마치 남극의 펭귄이 되어, 버스정류장의 번호 표지판이 되어, 기차역 한편의 CCTV가 된 듯 타인의 삶을 지켜보는 일. 연극 <터미널>은 그렇게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