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속에서 연말이라는 사실보다는, 새해가 다가온다는 감각이 더 선명한 요즘이다. 연초를 어떻게 보낼지 고민하게 되면서 올해 초도 함께 돌아보게 되었다. 그 시기에 관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영화다. 별다른 일정이나 당장 해야 할 과업이 없었기에 영화를 몰아봐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집에서 한 주에 두세 편씩 봤다.
얕은 햇빛이 집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는 거실에서 홀로 영화를 볼 때의 한가로움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고, 가끔은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영화가 끝나면 어느새 밖은 어둑해져서,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는 화면만 밝게 빛나고 있다. 그때 가족들이 한명 한명 귀가하기 시작하면, 나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온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끼곤 했다. 그렇기에 이번 연초를 영화와 함께 돌아보며, 내년 연초를 천천히 준비하려고 한다. 올해 초에 본 것 중, 특히 겨울과 어울리는 영화를 3개 선정하여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첫 번째로 소개할 영화는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이다. 이는 1989년에 개봉한 스페인 영화로, 실제 핀란드의 록 밴드인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들'을 소재로 하여 제작된 영화다. 시베리아에서 무명으로 활동하던 밴드가 미국으로 가서 새롭게 활동한다는 내용이다.
특이한 스타일링을 한 밴드 단원들의 시크하면서도 어딘가 따뜻한 면모, 영화 전반의 썰렁한 분위기 그리고 사이마다 끼어있는 코미디가 특히 인상적이다. 미국에 적응하는 이들의 이방인의 면모, 자본주의에 대한 풍자가 깔려있으나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해학과 휴머니즘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밴드 악주로 흘러나오는 다양한 음악 또한 즐길 포인트 중 하나다.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이제 그만 끝날까 해>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2020년 영화다. 영화는 담담하지만 어딘가 서글픈 여자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영화는 남자가 자신의 애인과 함께 부모님 집으로 향하며 벌어지는 일을 그려낸다. 두 사람이 그 집으로 향하는 동안 매서운 눈보라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몰아친다. 남자와 여자 사이 건조하고 막막한 분위기는, 남자의 집에 머물고, 부모님과 대면하는 과정에서 더욱 기괴하게 고조된다.
영화는 한 사람의 일생을 자전적인 시선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발생하는 왜곡된 주관과 해소되지 못한 슬픔, 미련들이 꿈 혹은 주마등처럼 서순 없이 스쳐 지나간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더욱 심해지는 눈보라는 마치 제목을 그대로 따라가는 듯하다. 이러한 인물의 시점을 통해 우리 또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되돌아보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관해 생각하게 한다.
처녀 자살 소동
마지막으로 소개할 영화는 2000년에 개봉한 <처녀 자살 소동>이다. 겨울의 짧은 낮처럼, 영화의 러닝타임도 97분에 불과하다. 미국의 보수적인 어느 마을에 살고 있는 5명의 자매 이야기다. 영화 화자는 자매들과 나이가 비슷한 형제들이다. 소녀들의 옆집에 살고 있는 그들은 소녀들을 어디까지나 멀리서 망원경으로 엿보며 단편적인 모습만을 목격한다. 그들은 그 이야기 사이의 행간을 자신들의 상상으로 채워내는데, 이는 소녀들의 현실과 너무나 괴리되는 지점이다.
화자의 나레이션과 실제로 벌어지는 사건 간 부조화는 소녀들의 서사가 왜 한낱 '소동'이라는 추억으로 마무리되는지 물으며, 여성을 향한 관음적 시선과 대상화의 폭력에 대해 말한다. 더불어 모든 장면이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표현되는 것에 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되는, 짧지만 매우 강렬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소개한 영화들은 내가 올해 초를 돌아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고 겨울의 계절감과도 잘 어울리는 것들이다. 유난히 고요하고 빠르게 어둑해지는 순간. 이 계절에 보는 영화는 내 현실에 그대로 덧입혀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피곤하고 지쳤던 한 해를 마무리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과정에서, 잠시 영화와 함께 숨을 돌려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