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
어떤 대상의 의의나 가치를 다시 들추어 살핌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그 가치를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매년 한 해를 대표하는 트렌드 키워드가 선정된다. 연말쯤 되면 트렌트 채널에서 분석한 내용을 주르륵 훑어보는 편인데 내년이 또 말띠의 해라 평소보다 집중하면서 본 것 같다. 기억에 남는 2026 키워드를 꼽자면 “나 우울해서 빵 샀어” 같이 자신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서 소비하는 ‘기분경제’와 보다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려는 ‘근본이즘’ 정도 되겠다. 조금 묻어가는 느낌인데 여기에 개인적인 키워드를 하나 더 추가해 보고 싶다. 그럴듯하게 구는 태도, ‘척’이다.
‘척’은 내게 따끈따끈한 단어다. 사실 이 단어를 내년 키워드로 삼은지는 얼마 안 됐다. 지난 달 말일에 등산을 갔다가 나 좀 척하는 데 소질 있네? 하고 느꼈다. 예쁜 척, 귀여운 척, 잘난 척, 아는 척, 모르는 척, 있는 척, 태연한 척 등등 여러 종류의 척이 있겠지만 나의 척은 그쪽과 관련이 없다. 임기응변이긴 했으나 ‘자신 있는 척’에 더 가까웠으니 말이다. 그 척은 마치 기세 등등한 모습과 비슷하다.
등산 경력이 고작 2회에 달하는 햇병아리는 악어봉에서 프로 등산러인 척했다. 등산 코스로는 비교적 수월한 산이라고 하는데 사부작 걷는 산책인에겐 제법 난이도가 있었다. 초반에는 나무데크길이었지만 그 이후로 좁고 비탈진 흙길의 연속이었다. 숨은 또 왜 그리 차는지 중간에 멈춰 서서 호흡도 여러 번 가다듬었다. 스틱을 부들부들 짚으며 가고 있었는데 한 꼬마 아이가 나무 뿌리를 의자 삼아 앉고서 야무지게 물을 마시는 걸 보고 괜히 머쓱하기도 했다.
그놈의 경치 얼마나 끝내주는지 보자 하고 도착한 정상은 충격적일 정도로 장관이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악어봉 경치는 모든 잡생각이 멈출 정도로 눈부시게 푸르렀다.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호수와 맞닿아 있는 산자락이 신기하게도 물속에 반쯤 잠긴 악어떼를 닮아 있었다. 눈으로 직접 봐야 그 황홀함을 완전히 느낄 수 있을 거란 확신에 연신 사진을 찍으면서도 아쉬웠다.
악어봉 풍경으로 모든 걸 보상 받은 기분이 들어서였는지 하산할 때는 비교적 덜 투덜거렸다. 내려와서 등산로 초입 카페로 향하는데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성 한 분이 “오늘 정상 어때요? 경치 잘 보여요?”하고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평소의 나라면 “예, 잘 보여요” 정도로 대답했을텐데 왠지 그러기가 싫었다. 숨겨 두었던 내 안의 능구렁이미가 스멀스멀 올라오더니 어느새 입 밖으로 이런 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사진 보여드릴까요?”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사진첩을 열어 그분에게 나의 악어봉 사진 컬렉션을 보여주었다. 뿌듯함에 입이 자꾸 씰룩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어우, 제대로네요”라는 대답을 듣고서 악어봉 다람쥐로 빙의한 나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또 한 명의 남성 분을 만났다. 여기 입구가 어디인지, 올라갈 때 힘든지를 묻는 그분의 질문에 다시 한번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아요(죄송합니다. 힘들었습니다), 저기 육교로 올라가시면 돼요”
산을 나보다 더 많이 타고 잘 타는 동생이 옆에 있었는데도 초보자인 내게 질문이 쏟아졌던 이유가 궁금해진다. 허리춤에 묶은 점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한 손에 접어 쥔 등산스틱 때문이었을까? 아무리 봐도 악어봉을 밥 먹듯이 오르는 척한 게 제대로 먹힌 것 같다. 동생이 어이없어하는 얼굴을 안 봐도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악어봉의 정기를 2026년에 잘 엮고 싶다. 붉은 말의 해를 잘살기 위해 내가 가진 무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거대한 트렌드 물결 속에서 어떠한 궁극의 필살기를 펼쳐 나갈 수 있을까. AI가 무섭게 진화 중인 동시에 인간다움을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교집합적 시대에서 나는 무얼 할 수 있으려나. 너무 비장한 말투로 얘기한 것 같은데 결론은 이미 진작에 났다. 악어봉에서부터 했던 결심 그대로다. 예측 불가한 미래로 불안에 떠는 대신 차라리 척을 하기로 했다. 내가 혼자 몰래 떨고 있는 건 아무도 모르니 그냥 더 자신 있는 척, 잘하는 척, 가능한 척 다 해보기로 한다. 내년 생존 키워드는 이제부터 ‘척’이다. 악어떼인 척 기세 좋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