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취하지 않았을 때 태인은 상호에게 언제 그랬냐는 듯 필요한 말만 했고, 자신의 세계에 몰두했다. 그랬기에 술에 취한 태인이 진짜 태인인지, 알코올이 빠진 태인이 진짜 태인인지 헷갈렸다. ··· 그러다, 태인의 말을 떠올렸다. 이건 상태일 뿐이다. 본질은 아니다. 상태에 속지 말자. 하지만 본질이 도대체 뭘까? - p.110, 상호의 독백
『fin』은 두 명의 배우와 그 배우를 보조하는 각각의 매니저 두 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잘 나가는 배우였지만 애인 M과의 결별, 약으로 인한 이미지의 추락, 늙어가는 몸과 정신에 지쳐 있는 기옥은 자신의 매니저 윤주에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윤주는 기옥의 비위를 맞춰주며 기옥의 곁에 남아 있지만, 사실 기옥을 동경하고 부러워하며 그녀의 자리를 탐내기도 하는 평범한 인물이다. 기옥은 자신을 붙잡아주는 윤주가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신하고 싶어한다. 빛나는 기옥이 바래가는 자신의 빛을 한탄할 때 윤주는 기옥의 그림자 속에서 쓴웃음을 날린다. 기옥의 삶은 겉으로는 완벽한 듯 보이지만 기옥은 매 순간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위태로운 순간을 자신이 만들어낸 가면으로 겨우 버텨가며 살아가는 기옥에게 매여있는 것이 없는 윤주의 삶은 자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윤주는 자유로운 것이 아닌 남의 그림자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자신의 모습과 부유하고 이름있는 기옥을 비교한다.
또다른 배우 태인은 누구보다도 연극의 순간에 심취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며 살지만 늘 술에 취해 가정을 소홀히 한다. 태인의 가정, 특히 아내 혜림은 그런 태인을 이제는 놓아주고 싶어하면서도 그러지 못한다. 태인을 보조하는 매니저 상호는 자신이 완전해졌을 때, '좋은 순간'이 찾아왔을 때 무언가를 하겠다고 마음만 먹으며 시간이 부쩍 지나 후회하는 사람이다. 상호는 명배우 태인을 동경하고 그의 연기를 좋아하지만 그의 가정에 소홀하고 타인과의 관계가 온건치 않은 그의 이면 속 미성숙한 자아를 들여다보고 그에 대한 경외, 동경심을 내려놓는다. 상호는 태인의 아내 혜림을 만나면서, 태인과 차 안에서 대본을 맞추는 상대가 되어보며 태인의 자리에 있는 자신에 종종 심취하기도 한다.
기옥-윤주와 태인-상호는 여러가지로 비슷한 점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연극'이라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들이다. 기옥과 태인은 명성과 부를 얻었지만 끊임없이 자신을 무언가에 취한 상태로 유지하며 연극하듯 살아간다. 기옥은 약에, 태인은 술에. 기옥과 태인이 맡은 <밤으로의 긴 여로>라는 극중극 주인공들은 기옥과 태인을 꼭 닮아있다. 기옥과 태인은 자신의 역할인 '메리'와 '제임스'를 현실에서도 계속해서 연기를 이어가며 자신의 이면을 숨긴다.
그리고 이 이면의 히스테리는 매니저인 윤주와 상호가 오롯이 떠맡는다. 윤주와 상호는 동경의 대상이었던 기옥과 태인이 이제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며 그들 사이에는 미묘하고 아슬아슬하게 깨질 듯한 기류가 흐른다. 윤주는 기옥이 가진 부를 남용해보면서, 상호는 태인의 대사 상대이자 그의 가정을 대신 다녀가는 주체로서 둘은 '기옥'과 '태인'을 연기하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각 배우의 그림자 속에서 이빨을 숨기고 입바른 말을 하는 그들 또한 어느 순간부터 무대의 조연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들의 모습은 때로는 우리 삶과 가장 밀접하면서도 가장 동경하는 부분과 가장 감추고 싶은 부분을 동시에 보여준다. 서로가 서로를 연기하고 감추고 훤히 드러내는 관계 속에서 태인의 죽음으로 이들의 감정선이 극에 치닫는다. 윤주는 상호의 말을 통해 상호가 태인의 죽음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태인과 같이 있었지만 살아있는 상호는 태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가장한 자백)을 끊임없이 묻는 경찰들에게서 침묵한다. 윤주 또한 기옥에 대한 살의를 종종 느꼈지만 행동으로 취하지 않았으나, 상호는 직접적으로 태인의 죽음에 일조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진정으로 오롯이 상호의 잘못만은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태인의 죽음이 네 사람의 관계에 금을 만들었고 그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태인은 상호에게 취한 자신의 모습은 '상태'일 뿐이라며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취한 태인은 주로 진심인지 연기인지 모를 말들을 상호에게 내뱉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자신과 자신이 맡은 극중 인물의 경계를 혼동하며 연기를 하면서도 연기같지 않은 애매함을 유지한다. 상태가 계속된다면 그것은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상태를 뒤집어 쓴 본질만을 진정한 것으로 보고 상태는 상태일 뿐이라는 것에 그쳐야하는가?
위수정 작가는 그들이 각자 맡은 '역할'과 현실의 '자신'의 경계선에 서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과연 상태와 본질에 대한 차이는 어떤 것인지 의문을 자아내게 한다. 본질이 따로 있더라도 그 본질을 덮은 상태만이 계속 보여진다면 그것은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우리 삶이라는 연극 속에서 동경하고 '되어야만 하는', '되고 싶은' 어떤 대상을 모방하며 연극하고 살아간다. 우리의 본질은 보여주고 싶을 때보다 숨기고 싶을 때가 더 많고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상태로써의 삶은 언제나 빛날 것만 같다. 그러나 이 상태도 언젠가는 빛이 바래고 (윤주와 상호가 자신들의 미래와 기옥과 태인의 운명을 겹쳐보듯) 무대가 막이 내리고 암전이 찾아오는 순간은 존재한다. 홀로 남은 순간, 찾아온 암흑과 숨막히는 정적, 그럴 때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되물을 것이다. 본질이란 과연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