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히스테리 엥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의 무대는 오색실과 새끼줄로 장식된 여러 그루의 당산나무에 둘러싸여 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기도의 대상이 되기도, 무당 굿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연극 <히스테리 엥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는 연극의 내용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당산나무를 무대장치로 과감히 선택했다. 관객들은 연극의 시작 전부터 무대의 신성하고 신화적인 분위기에 눈이 빼앗긴다.
그렇다면, 왜 당산나무였을까. 연극 <히스테리 엥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는 총 2막으로 구성된다. 1막에는 2025년 현재를 살아가는 은희, 화정, 대진, 미영, 순미, 유림 6명의 여성의 삶이 그려진다. 2막은 2058년으로 이동한다. 시간이 흘러 사회적 가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장년이 된(그리고 사망하기도 한) 배우들은 유림의 사고사 이후 유림의 유산 상속을 둘러싸고 갈등이 겪는다.
1막과 2막이 시간적으로만 구분된 것은 아니다. 연극의 형식에서도 차이를 둔다. 1막에서 배우들은 각자의 이야기만을 한다. 일종의 집단 독백극에 가깝다. 각자가 자신의 독백을 하는 동안 다른 배우들은 무대 뒷면에서 전면에 선 배우의 이야기의 그림자처럼 비슷한 동작을 보인다. 1막에서 이 여성들을 이어주는 것은 이 동작들과 연극의 주제곡 ‘어떤 여자들’(단편선/이오진 작)이다. ‘어떤 여자들은 노벨상을 탄다. 어떤 여자들은 아파트에 살고 어떤 여자는 킥복싱을 한다. 어떤 여자는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이게 불공평한가.’ 우리는 노벨상을 타는 여성과 아파트에 사는 여성, 킥봉싱을 하는 여성과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여성들을 떠올린다. 가사는 각 여자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다른 여성들을 떠올린다. 마지막 문장 ‘이게 불공평한가’. 우리는 불공평하지 않은 불공평함과 지속되는 불안을 안고 산다. 불안으로 짜인 각 배우들의 독백은 만들어진 것 같기도, 배우의 자기 서사 같기도 하다.
한편 2막은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극으로 구성된다. 1막에서 배우들이 한복을 변형한 듯한 화려한 옷을 입었다면 2막의 배우들은 일상복을 입었다는 점도 구분되는 점이다. 비혈연가족을 인정하는 근미래에 연극을 통해 인연을 맺은 6명의 배우는 사회적 가족을 이루었다. 작년에 죽은 은희는 영정 사진이 되어 거실에 앉아 있다. 유림의 사망과 알지도 못했던 유산의 등장을 기점으로 인물들은 자신의 몫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누가 제일 오래 유림과 살았는지, 누가 유림의 애인인지, 혹은 누가 가사를 담당했는지가 그 근거가 된다. 그들을 끈끈하게 이어주었던 이유가 이제 싸움의 이유가 되었다. 2막은 마치 통속극을 연상하게 한다. 이들이 사회적 가족이라는 사실을 빼면 닳고 닳은 가족극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다. 1막이 ‘히스테리’와 ‘엥자이어티’의 시간이었다면, 2막은 ‘춤추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소망이 담겨 무대에 올렸다.
다시 돌아와 와 당산나무였을까. 극 초반 대진은 히스테리의 기원과 정의를 말한다. 히스테리는 그리스어로 자궁이라는 의미. 히스테리는 자궁을 가진 여성에게 일어나는 자궁 건조증이다. 자궁이 건조한 이유는 성적 욕망의 부재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남성과의 결혼이다. 정신이 불안한 여자들, 연극은 불안을 두서없이 나열한다. 그리고 2막에서 이내 자신의 불안을 하나로 모아 굿을 올린다. 1막과 2막에는 모두 난입이 존재한다. 난입의 정체는 1막에서 연출 오진의 말이었다면, 2막은 죽은 은희의 분노였다. 이 난입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고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른다. 미치고 가난하고 어딘가 정신머리 빠진 여자들, 히스테리의 주체들이 굿판을 벌인다.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살 만한 삶과 살 만하지 않은 삶. 이것은 버틀러와 보름스가 삶을 살 만하게 또는 살 만하지 않게 만드는 조건에 대해 탐구한 대담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원저의 내용과 무관하게 제목만으로도 우리는 목에 무엇인가 막히는 기분을 받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살 만 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혹은 살 만하지 않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나의 조건 혹은 상황과 무관하게도 나의 삶은 지속된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을 보고 살 만하지 않은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객관적인 인간 생존의 상태를 모두 인식의 영역에 둘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어떤 삶은 살 만 하지 않게 여겨지는지, 또 왜 어떤 삶은 살 만하지 않게 되어버리는지, 그 경계 사이에서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살아감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관객은 연극 <히스테리 엥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 연출 의도에 조응하여, 혹은 그를 배신하며 관객들은 6명의 인물 중 누가 더 살 만하지 않은지 생각/판단할 것이다. 50만 원의 용돈을 받는 대학생은 살만해 보이고, 수입이 불안정한 배우는 조금 덜 살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돈 없는 사람에게 던지는 ‘너는 하고 싶은 대로 산다’라는 말의 잔인함과 나이 들어가는 신체와 관계는 살만함과 살만하지 않음을 널뛴다. 대체로 살 만하지 않은 사람도 하루는 행복할 수 있다. 어쩌면 일주일도. 또 어쩌면 자신 앞에 놓인 오 년 혹은 십 년 정도의 세월에 대한 전망을 그려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다음은?
왜 2025년도의 여자들은 2058년으로 가야 했을까. 병렬적으로 이어졌던 고민을 왜 가족으로 묶고자 했을까. 오늘의 보편적인 동시에 기이한 여자들을 가족 간 유산 상속 문제라는 구태의연한 레퍼토리로 데리고 오고 싶었던 욕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 다음은?'에 대한 연극적 답변은 아니었을까. 연극 <히스테리 엥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의 강렬한 첫 대사는 다음과 같았다.
나를 포함한 내 사람들 모두를
관계로 나이로 사회적 시선으로 정해서 하나로 불러 버리는,
그 이름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 아줌마로부터,
누군가 그냥 불러버리면 그것이 되어버리는 강렬함으로부터
우리는 그냥 불러버리면 그것이 되어버리는 강렬함의 세계에 산다. 행복하게 사는 여자와 아직까지 사는 여자들의 시장통에서 산다. 그 둘은 어쩌면 매일 바뀔지도. 불안과 불행과 비루함과 비참함을 연극은 애써 숨기지 않고 일단 모두 무대에 던져버리는 선택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인 암전 속 배우들의 화목한 식사에서 우리는 안도감을 느꼈을 것이다. 얼렁뚱땅 도착한 마지막이 싫지만은 않았다. 그냥 불러버리면 그것이 되어버리는 강렬함의 세계로 끝이 나면 아무래도 춤출 기운은 나지 않았을 테니. '그 다음은?'에 대한 더 많은 물음과 답변을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