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시가 끝나자마자 알바를 시작한 스무 살, 어떤 손님이 나를 이렇게 불렀다. "아가씨"
아가씨?? 내가 아가씨라니... 벌써? 나 아직 그냥 아가 아닌가?
국어사전에 검색해 봤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자를 이르거나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럼 틀린 말은 아닌데, 당연히 날 그렇게 부를 수도 있는 건데, 왜 기분이 이상하지? "저기요"나 "학생"이라고 불리는 것보다는 낫나? 아니다, 적어도 그 말들에서는 이 묘한 당혹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부정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 아가씨가 아니고 싶다. 이렇게 내가 날 정의할 때 떠올려 본 적이 없는 단어에 대해 당황한 경험은, 저번 주 목요일에 보고 온 음악극의 어떤 대사가 유독 마음에 와닿게 했다.

이것을 듣고 생각했다. 누군가 그렇게 불러서 아가씨가 되어 버렸듯 시간이 지나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겠구나. 나는 할머니가 되는 게 늘 무서웠다. 모아둔 돈은 있을까.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그와 함께 노년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을까. 건강이 더 안 좋아졌을 텐데 집이나 병원에서 꼼짝없이 티비나 보며 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이렇듯 할머니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하는 마음은 대체로 '기대'보다는 '불안'이었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이 미래에 대한 불안은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함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나는 평생 먹고 살 돈이 없고, 나와 노년을 같이 보낼 것 같은 애인이 없고, 벌써부터 어떠한 이유로 매일 약을 먹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는다. 이렇게 지금의 내가 불안하고 불완전하기에, 불안하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만 이런 게 아니었나 보다.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춤추는 할머니>는 그러한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공유한다.

이 극은 여섯 명의 여성 배우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 중에서 할머니는 없다. 20대부터 60대까지의 배우들이 자신들의 현재와 할머니가 된 미래를 상상하며 그린다.
1막의 주제는 "2025년의 여자들"로, 배우들이 돌아가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한다. 여섯 명의 여성들이 한 명씩 자기 얘기를 한다는 점에서 뮤지컬 <시카고>의 넘버 "Cell Block Tango"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 넘버와 이 작품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Cell Block Tango"에서 자기가 왜 살인을 저질렀는지 설명하는 여성 죄수들의 이야기는 공감하기 어렵지만, 이 작품 1막의 크고 작은 인생 이야기는 왠지 내 얘기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배우들은 매일 조식 뷔페에 가고 싶다는 귀여운 희망을 얘기하기도 하고, 어린이 직업 체험 테마파크에서 일하다 힘들어서 관뒀다며 욕을 뱉기도 한다. 또한 배우 일을 하면서 번 돈이 얼마인지 1원 단위까지 세세하게 알려주며 자신을 '침을 뚝뚝 흘리는 소'에 비유하기도 하고, 밖에서 자신이 자살해 버릴까 봐 문밖으로 나와 자신을 지켜본 친구 얘기를 꺼내기도 한다. 이렇게 어딘가 어지러운 일상을 솔직하게 들려주니, 뭔가 나도 끼어들어 내 얘기를 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2막의 주제는 "2058년의 여자들"로, 한 명 한 명의 이야기가 교차되어 중첩되었던 1막과는 달리 2막에서는 그 인물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생활 동반자법과 사회적 가족법이 법제화된 상황에서 발생한 재산 분배 문제를 유쾌하게 그려낸다. 가장 나이가 어렸던 '유림'이 세상을 떠났고, 생활 동반자였던 '대진'과, 연인 관계였던 '화정'과, 매일 밥을 챙겨주었던 '미영'과, 가끔 집에 들르는 '순미'가 유림의 재산을 어떻게 나눠 가질지 의논한다. 결국에 이미 죽은 '은희'가 그들에게 나타나 어떻게 분배할지를 명령하며 상황이 마무리되어버리는 이야기는, 나에게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래, 할머니가 되어도 저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남편이나 자식이 아니더라도 그냥 오래도록 연을 이어 온 누군가와 같이 밥을 먹고, 실없는 얘기를 나누고, 가끔 먼저 떠나 간 이를 그리워하고, 또 가끔은 서로 눈치 보며 싸우기도 하면서. 지금과 다를 바 없이. 히스테리를 부리고, 불안에도 떨면서. 가끔은 춤도 추고.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되어도, 그건 나의 특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니 그저 '할머니'가 되지 말고, '어떠어떠한' 할머니가 되자. 할머니를 넘어, 춤추는 할머니를 넘어, 그 말 앞에 나를 표현하는 수식어를 왕창 붙여 버리자. 그러면 할머니라는 단어는 그 많은 단어의 배열 중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그저 한 단어일 뿐일 테니까. 이 작품의 제목처럼. 나를 지칭하는 수식어 중에서 히스테리, 앵자이어티 같은 부정적 단어들이 있으면 뭐 어떤가? 그것들도 수많은 수식어 중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지금의 나를 '아가씨'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는 도통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어찌 됐든 끝은 '춤추는 할머니'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름 괜찮지 않을까.
뭐야, 이렇게 생각하니까 할머니가 되는 게, 나이가 들어가는 게 전보다는 두렵지 않다.

이 극이 좋았던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희망적이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가진 상황을, 가질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그저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 "할머니가 되면 행복할 거다"라고 말하는 밝은 극이 아니다. 이 작품은 각자가 가진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과 히스테리를 마음껏 드러내고 직면한다. 어쩌면 그러한 직면이 불안을 해결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불안을 내 것으로 다뤄보려는 노력의 시작점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어떤 여자들은 노벨상을 탄다
어떤 여자들은 아파트에 살고
어떤 여자들은 행복하게 산다
어떤 여자들은 아직까지 산다
이것이 불공평한가?
극이 시작되며 나오는 노래는 극이 끝나며 한 번 더 나온다. 나는 "이것이 불공평한가?"라는 가사 뒤에 이러한 말이 떠올랐다. "불공평하면 뭐 어떤가?"
모두가 다 다른 수식어를 가지고 사는 인생, 공평하고 불공평할 게 뭐가 있겠는가. 어차피 다 늙어서 할머니가 되는데. 할머니가 되면 또 뭐 어떤가. 히스테리를 부리고 앵자이어티하지만 춤추는 할머니라면 나름 괜찮지 않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스스로 그렇게 이름 붙인다면 조금은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미지 출처 : 인스타그램 @doosanartcent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