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렬한 붉은색 표지 위로 검은 활자가 비수처럼 꽂힌다. ‘예술은 죽었다.’

이토록 도발적인 선언을 내뱉은 이는 누구인가. 그는 예술계의 변방에서 냉소를 던지는 비평가가 아니다. 오히려 그 시스템의 가장 깊숙한 곳, 2018년 세계 최고의 아트 페어 ‘아트 바젤’에서 발루아즈 상을 수상한 유일한 아시아 갤러리 ‘원앤제이’의 설립자 박원재다. 한국의 재능 있는 작가들을 세계 무대에 알려온 그가, 자신의 터전이자 삶인 예술을 향해 사망 선고를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책장을 넘기며 마주한 이 죽음의 선언은, 역설적이게도 예술이 다시 ‘살아야 한다’는 가장 뜨거운 절규였다.
박제된 예술: 미술관이라는 이름의 무덤
저자는 우리가 흔히 ‘예술의 성전’이라 여기는 미술관을 ‘예술이 죽으러 가는 곳’이라 명명한다. 다소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오늘날의 미술관은 작품을 삶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하얀 벽 안에 가두는 거대한 영안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들어간 예술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예술은 관람객의 삶과 분리되어 오히려 손댈 수 없는 성물처럼 변모한다. 이는 예술의 본질과 대치된다. 예술은 본디 삶의 한가운데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소비되며, 감정을 자극하고, 사고를 촉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술관에 들어간 예술은 이 과정을 멈추고 '기록물'이 되어버린다.” (p.22)
그곳에서 예술은 더 이상 펄떡이는 생명체가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방부제로 처리되고, 엘리트주의라는 유리관 속에 갇힌 ‘박제’다. 대중은 그 앞에서 주눅이 든다. “이게 무슨 뜻이지?”, “얼마짜리 작품이지?” 난해한 현대미술 앞에서 우리는 감각하기를 멈추고 학습하기를 강요받는다. 예술이 지식과 자본의 전유물이 되는 순간, 관객과 작품 사이의 본능적인 연결고리는 끊어진다. 아서 단토가 말한 ‘예술의 종말’처럼,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닌 개념과 가격표만이 남은 공허한 풍경. 저자는 바로 이 지점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본디 예술은 ‘삶’이었다: 잃어버린 감각을 찾아서
그렇다면 죽어버린 예술을 어떻게 애도해야 할까. 저자는 비탄에 잠기는 대신 시계를 거꾸로 돌려 예술의 본질, 그 태초의 순간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저자는 ‘몸’과 ‘감각’의 회복에서 그 열쇠를 찾는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몸을 억압하고 이성을 우위에 두는 과정이었다. 고대 인류에게 예술은 생존이었다. 춤을 추고, 노래하고, 벽화를 그리는 행위는 삶과 분리된 ‘감상’의 영역이 아니라, 몸으로 세상을 감각하고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예술은 머리가 아닌 ‘몸’에서 시작되었다.
“고대는 몸을 죄와 욕망의 근원으로 억눌렀고, 중세는 신의 뜻 앞에 몸을 완전히 눌러놓았다. 근대는 인간을 주체로 삼았지만, 역설적으로 몸의 해방이 아닌 마음의 지배를 강화했다. (…) 이로 인해 인간은 '보편적 존재'라는 허상을 갖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자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재단하는 자기중심주의를 낳았다.” (p.106)
책은 이 ‘신체성’과 ‘감각’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예술의 부활을 위한 열쇠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 정점으로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ć)의 퍼포먼스를 소개한다. 2010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예술가가 여기 있다>에서 그녀는 3개월간 말 한마디 없이 오직 눈빛으로 관객과 마주했다.

“이 단순한 행위는 깊은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관객은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미소를 지었으며, 또 다른 이는 오래 묻혀 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 관객은 "그녀의 눈에서 잊었던 가족의 얼굴을 보았다"라고 전했고, 다른 이는 "침묵 속에서 내 심장 소리를 처음 들었다"라고 말했다.” (p.89)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의 <나의 침대(My Bed)> 역시 마찬가지다. 헝클어진 시트, 널브러진 술병과 속옷, 사용한 콘돔…. 그녀의 지극히 사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상이 그대로 전시장으로 옮겨졌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그 적나라한 풍경 속에는 이별과 우울, 삶의 비릿한 냄새가 진동한다. 우리는 그 앞에서 작가의 아픔을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하게 된다.
나아가 예술은 파편화된 개인들을 다시 ‘공동체’로 묶어주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현대 사회의 개인주의 속에서 우리는 점점 고립된 섬이 되어가지만, 예술은 그 섬들을 잇는 다리가 된다. 그 예로 프리다 칼로의 <두 명의 프리다>를 들 수 있다. 멕시코와 유럽이라는 이질적인 정체성을 한 화폭에 담아낸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갈등의 표현이 아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갈등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이러한 정체성이 공존할 수 있음을 시사하며 다양성의 가능성을 강조한다. 프리다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획일화된 예술의 틀을 넘어 다양한 정체성과 목소리를 수용하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서로 다른 우리가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이 난해한 질문에 대해 예술은 ‘다양성’과 ‘공감’이라는 언어로 답하고 있는 것이다.
소유에서 경험으로: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예술
결국 저자가 말하는 ‘예술의 죽음’은 과거의 낡은 관습, 즉 예술을 고상한 지식이나 투기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것은 ‘소유’하는 예술이 아닌 ‘경험’하는 예술이다.

디지털 시대, 우리는 루브르에 가지 않아도 모나리자를 본다. 이미지는 범람하고 원본의 아우라는 희미해졌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직접적인 체험’은 더욱 귀해졌다. 작품이 걸린 벽을 넘어, 작가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관객이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작품을 완성하는 주체가 되는 것. 저자는 이것이 앞으로 예술이 나아가야 할 길이며, 서로 다른 우리가 공존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나가며: 당신의 감각을 깨울 초대장
<예술은 죽었다>는 냉소적인 비판서가 아니다. 오히려 예술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것이 박제된 채 시들어가는 것을 볼 수 없었던 한 기획자의 뜨거운 연서(戀書)에 가깝다.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예술은 죽지 않았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너무 멀리 두었을 뿐이다. 이제 갤러리의 높은 문턱을 낮추고, 난해한 설명문을 걷어치울 때다. 대신 우리의 몸과 감각을 열어젖혀야 한다.
저자의 말처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이나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다시 느끼고, 다시 연결되고, 다시 살아내는 감각이다. 예술이 다시 밥이 되고, 숨이 되고, 살이 되어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돌아올 때,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죽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