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인류는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왔다.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담아내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표현되고 기록된 경험과 감각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신화고, 그것이 축적되어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비로소 철학인 것이다.

 

예술은 종교였고, 신화였고, 역사였으며, 철학이었다. 결국 예술은 우리의 몸으로 시작된 삶 그 자체의 표현이었다. 삶의 부차적인 표현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엮여가는 방식이었다.

 

- 79p

 

    

예술은 죽었다!라는 이 강렬한 표지와 책등의 제목. 언뜻 더 이상 예술은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저자인 박원재는 2005년 원앤제이 갤러리를 설립하고 한국의 재능 있는 작가들을 세계 무대에 알려왔다. 2018년 세계 최고의 아트 페어인 아트 바젤에서 발루아즈 상을 수상한 유일한 아시아 갤러리를 이끈 그가 별안간 왜 예술이 죽었다고 이토록 강렬히 선포하는 것일까?

 

1부 내내 자본주의와 기술로 인해, 공허해진 예술에 대한 통렬한 실마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예술은 죽었다,고 강렬히 선포한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다.

 

여전히 살아 있다고, 예술은 여전히 우리의 삶과 함께 있으며,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서이다.

 

 

예술은죽었다_표지평면.jpg

 

 

 

1부, 예술은 왜 멀어졌는가?


 

예술의 죽음은 한 사람이나 한 사건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다. 1부에서 박원재는 예술사를 찬찬히 톺아보며 그 요인을 여러 가지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이 죽은 가장 큰 이유는 예술가들 자기자신이다.

 

뒤샹이나 워홀 같은 개념 예술가는 기존의 예술 개념을 깨부수며, 예술의 정의와 경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더 이상 인간이 이룩해내는 아름다움, 화폭이나 물감, 조각 같은 흔히 예술하면 떠올리는 것들이 아니라, 이게 예술이야? 라고 되묻게 되는 예술 작품이 우후죽순 등장한다. 아서 단토는 이러한 변화가 예술의 본질을 변화시켰고, 결과적으로 '예술의 종말'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개념을 깨부수는 것에는 도달했으며, 대중들 역시 더 이상 아름다움만이 궁극적인 예술의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의 예술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디지털 기술의 발달 역시 예술의 죽음에 한몫을 더한다. 인터넷 감상과 디지털로 쉽게 만들 수 있는 이미지, 이러한 기술 발전은 창작과 감상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 혹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직접 가서 모나리자를 보느니 인터넷에 검색으로 보는 것이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도르노는 복제 가능한 기술과 복제된 예술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아우라의 상실이 진보의 왜곡으로 나아가며 대량 생산으로 독자의 자율적인 판단 능력과 상상력을 억압한다고 비판했다. 예술에 대한 믿음이나 개념 자체가 부숴진 이때, 이러한 환경적, 기술적 변화는 예술과 관객 사이의 거리를 한껏 벌려놓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술가들의 작품은 천문학적인 가격에 거래되며 그 가격에 따라 사람들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진다. 저자 박원재 역시 2018년 아트 바젤에서 발루아즈 상의 수상으로 원앤제이의 이름이 알려졌을 때를 회고한다.

 

 

나는 또 다른 딜레마에 직면했다. 그 상은 인정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예술의 방향을 소수의 권위 있는 목소리가 정의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예술이 시장과 제도의 틀 안에서 평가받는 순간, '순수 예술'은 점점 더 멀어져갔다.

 

예술이 정말로 예술 자체를 위한 것이라면, 왜 우리는 끊임없이 외부의 승인과 가치를 갈구하는가? 이 모순 속에서 나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불가능성이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예술은 아이디어와 맥락에서 힘을 얻는다.

 

- 24~25p

 

 

저자는 미술관을 예술이 죽으러 가는 곳이라 소개한다. 조금 황당하게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예술이란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그 과정과 작품 속의 의미에 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오로지 '작품' 자체를 보기 위해 철저히 계산되고 꾸며지는 곳이다. 예술이 인간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오로지 보여지고 감상되기 위해, 제도화된 곳으로 입성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위해 철저히 검증되고 선발된 작품들은 그 '선발'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이름으로 인해 관객들은 언어 속에 갇힌다.


인정받은, 대단한 작품이라는 언어 속에서 작품은 규정되며 관객은 그 재구성된 작품을 예술로 받아들이게 된다. 엘리티즘과 자본주의로 점철되어, 예술이 예술 그 자체가 아니라 오로지 가치로 환원되는 돈과, 작품 자체의 소유권을 갖고자 아우성치며 예술의 본질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된 것이다.


 

 

2부, 본디 예술은 삶이었다.


 

예술이 죽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와서 뭘할 수 있는가. 애초에 예술이란 무엇인가. 비탄에 빠지기 전 저자는 2부에서 예술의 본질을 일깨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신체로 느낄 수 있는 것, '감각'을 선사하는 것이다. 다소 뚱딴지스러울 수 있지만, 저자가 책에서 말했듯 우리는 몸으로 살며, 신체를 통해 세상과 삶을 감각하고 지속한다.


고대 인류에게 삶은 생존이었으며, 몸은 그 삶의 가장 근본적인 중심이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그것을 잊어버렸다. 오늘날 예술은 삶과 분리된 어떤 개념, 공부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예술은 삶이며, 예술은 몸으로부터 시작되어 우리의 삶 그자체이다.


 

인류는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마주할 때마다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왔다.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을 담아내는 방법이었다. 그렇게 표현되고 기록된 경험과 감각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신화고, 그것이 축적되어 역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런 역사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비로소 철학인 것이다.

 

예술은 종교였고, 신화였고, 역사였으며, 철학이었다. 결국 예술은 우리의 몸으로 시작된 삶 그 자체의 표현이었다. 삶의 부차적인 표현이 아니라 삶 그 자체가 엮여가는 방식이었다.

 

- 79p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장 크게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추는 것에서부터 미메시스가 시작되듯, 우리는 유한한 신체를 통해 살아가며, 그 신체를 통해 감정과 감각을 느끼고 사고한다.


현대인은 육신보다 정신을 우선시 하고, 우월한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사실 그 모든 것은 우리의 몸으로부터 시작되는 삶이라고 짚어주어 좋았다.


같은 논의에서, 좋아하는 시가 있는데 소개하고 싶다.

 

 

옆구리를 긁다

 

임솔아

 

빈대가 옮았다 까마귀 몇 마리가 쥐 한 마리를 사이좋게 찢어먹는 걸 구경하

다가 아무 일 없는 길거리에 아무 일 없이 앉아 있다가 성스러운 강물에 두

손을 적시다가 모를 일이지만 풍경의 어디선가

 

빈대가 옮았다 빈대는 안 보이고 빈대는 안 들리고 빈대는 안 병들고 빈대는

오직 물고 물어서 없애려 할수록 물어뜯어서 남몰래 옆구리를 긁으며 나는 빈

대가 사는 커다란 빈대가 되어간다

 

비탈길을 마구 굴러가는 수박처럼 나는 내 몸이 무서워지고 굴러가는 것도

멈출 것도 무서워지고

 

공중에 가만히 멈춰 있는 새처럼 그 새가 필사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는 사

실처럼 제자리인 것 같은 풍경이 실은 온 힘을 다해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모래들이 있다

 

빈대는 나 대신 나를 물어 살고 빈대는 나를 물어 나 대신 내 몸을 발견한다

빈대가 옳았다 풍경을 구경하다가

 

 

빈대가 나의 옆구리를 물어 내 신체를 다시 재감각하는 내용의 시이다.

 

저자는 이렇게 예술의 본질과, 감각의 회복을 강조하며 2부에서 신체 감각을 다시금 깨우게 하는 여러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_Z7C5nwqW-yxxIX14-ZNK1snArM.jpg

 


이 작품은 1974년, 세르비아 예술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행위 예술 작품 <리듬0>이다. 아브라모비치는 장미, 깃털, 가위, 칼, 실탄이 장전된 총 등 72개의 물건을 테이블 위에 두고, 6시간 동안 자신의 신체를 관객들이 자유롭게 다룰 권한을 부여했다.


이때 관객들은 처음에는 장미를 주거나, 깃털로 쓰다듬는 등 소극적인 행동을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도 그녀가 꼼짝 않자 태도가 점차 과격해졌다. 옷을 찢거나 칼로 피부를 긋고, 혹자는 총을 겨누었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6시간이 지나고, 아브라모비치가 움직이자 몇 관객들은 그 자리를 떠났다. 이 작품은 인간의 감각적 본능과 집단적 행동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신체를 통해 감각적 경험과 사회적 상호작용의 장을 보여준다.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신체를 통해 감각의 원초적인 힘을 드러낸다. 

 

 

 

3부, 일상으로 돌아온 예술은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3부에서, 이제 지금의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짚어주는데, 그것은 바로 '체험'이다. 예술이 앎의 영역으로 받아들여지며 삶과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었고, 관객 역시 예술과 거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예술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돈과 같은 가치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도 긴밀하게 엮여 있다.

 


IMG_1122.jpeg

 


이 작품은 1998년, 트레이시 에민의 <나의 침대>라는 작품이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 담배꽁초, 술병, 더러운 속옷, 사용한 콘돔 등 그녀의 일상적인 침대를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다.


에민은 이 작품을 통해 1990년대 자신의 삶-연인과의 이별, 알코올 중독, 우울증, 그리고 낙태의 아픔-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책에 실린 사진으로 이 작품을 보았을 때, 사진만으로 작품을 보는 것인데도 작가의 녹록치 않았던 어떤 아픔이 여실히 느껴졌다.


저자가 강조한 체험과 경험으로 관객마저 이끄는 작품이다. 예술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되살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일상의 영역, 삶의 영역으로 다시 예술을 환원시키는 것.


체험과 참여의 영역으로 예술 작품을 열어 관객을 환대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