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서 연극을 뜻하는 단어는 보통 ‘play’와 ‘drama’로 나뉜다. ‘drama’가 더 진지하며 희곡에 중점을 두는 단어라면, ‘play’는 연극의 놀이적 성격을 강조하는 단어이다. 어릴 적 했던 역할놀이처럼, 연극은 사람들이 규칙을 정해두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연기하며 만들어가는 하나의 놀이이다. 극장에서 배우는 직접 놀이를 수행하고, 관객은 놀이를 지켜보는 역할로서 함께 참여한다.
연극 <트랩>에서도 이러한 놀이의 특성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연한 사고로 시골 저택에 하룻밤 머물게 된 트랍스는 집주인과 친구들의 식사 자리에 초대받는다. 처음에는 가벼운 식사 자리인 줄 알았으나, 이들은 곧 모의재판 놀이를 시작한다. 그렇게 피고로서 놀이에 초대받게 된 트랍스는 점차 자신의 과거와 비밀을 털어놓고 재판받게 된다.
<트랩>은 법정극의 형식을 띠지만, 그 안의 모의재판은 실제 법정처럼 법으로 심판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규칙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이들의 재판에서 다루는 죄는 법적으로 처벌받을 만큼 크지는 않지만, 사람의 양심에 비춰봤을 때 문제가 되는 지점에 있다. 비교적 가벼운 죄를 두고 진행되는 만큼 재판의 분위기 역시 웃음과 농담으로 가득하다. 재판의 끝에 어떤 형벌이 내려지든 결국 놀이이기 때문에, 재판을 진행하는 사람들은 진지하기보다는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트랍스가 심판받게 된 죄 역시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준이 아닌,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여지가 있는 수준의 문제이다. 트랍스가 상사를 살해한 것은 아니지만, 상사의 병세를 알면서 아내와 간통하고 이를 상사가 눈치채도록 방치한 행동은 충분히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처음 트랍스는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지만, 검사가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오히려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명확하게 사형을 내려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놀이로서의 재판은 인물의 감정 변화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놀이는 술과 안주를 곁들인 자리에서 진행되며, 놀이가 절정에 오를수록 더 좋은 와인을 꺼내 와 함께 마시고 환호한다. 놀이의 감정 흐름은 놀이의 주요 소재가 된 트랍스의 반응과 맞물려 돌아간다. 트랍스가 순순히 죄를 인정해버리자 사람들은 오히려 흥이 깨졌다며 아쉬워하기도 하며, 선고가 내려질 때는 뛸 듯이 기뻐하기까지 한다. 재판관들에게 모의법정은 어디까지나 하룻밤을 즐겁게 보내기 위한 유희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연히 이 놀이에 끌려 들어온 외부인이자 현실과 가장 가까이에 서 있는 트랍스는 놀이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재판이 끝난 후, 트랍스는 놀이에서 자신이 느낀 감정과 생각을 토대로 어떠한 선택을 내리게 된다. 재판관도, 배심원 역할의 관객들도 예상치 못한 선택은 다시 한번 처음 문제시되었던 트랍스의 잘못, 그리고 양심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법적 책임이 없다고 해서 도덕적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책임을 회피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아예 잊은 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결백할 수 없다면,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인가?
이 과정에 <트랩>은 관객을 배심원이라는 역할로 초대한다. 무대 역시 실제 법정을 연상시키는 삼면 구조로 관객이 무대를 둘러싼 형태이며, 배우들은 재판을 진행하다 종종 배심원을 호명하는 등 극으로 관객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렇게 놀이에 참여하게 된 관객은 마지막에 트랍스의 선택을 마주하며 배우들과 함께 동요하는 존재가 된다. 재판관들에게도, 배심원에게도 단순한 놀이였던 재판이 왜 트랍스가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들었을까? 관객은 함께 동요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질문해 보게 된다.
연극이 끝난 후 제목 <트랩>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이 극에서 트랩, 함정은 무엇이었을까? 처음 놀이를 제안한 재판관들일까? 혹은 자신은 결백하다고 믿어온 트랍스의 삶일까? 아니면 트랍스가 최후의 선택을 하게 만든 양심이 우리가 놓치고 있던 함정일지도 모른다. 트랍스의 선택을 통해 드러난 그 함정을 보며 우리가 회피하고 있던, 혹은 잊고 있었던 양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