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 안녕하세요 저는—
이라고 시작해보려 했지만, 형식적인 자기소개는 나와 잘 맞지 않는다. 그래서 대신, 나와 나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어쩌면 더 지루한 소개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를 말할 때 예술을 빼놓는 건 불가능하니까.
첫 만남
맞벌이인 부모님을 대신해 할머니나, 옆집 이모와 함께 지냈던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심심했던 나는 늘 무언가를 만들었다. 대 여섯살 때부터 나름대로의 창작을 시작했다. 어떤 때에는 시를 쓰기도, 글을 적기도, 소설을 쓰기도, 만화를 그리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쌓인 A4용지는 몇백 장이 넘어갈 정도였고, 지금도 여전히 집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리고 이모와 할머니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였음에도 둘이 입을 맞춘 듯 우리 엄마에게 얘기했다.
‘유빈이는 예술을 하게 될 거야!’
라고….
만남, 그리고 잠깐의 이별
아빠는 글 쓰는 걸 좋아했다고 한다. 집안 사정으로 결국 법대에 갈 수 밖에 없었지만, 우리 아빠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한때 아빠의 옷장 안에 처박혀 있던 기타를 들고, 난 기타리스트를 하겠어! 하던 적이 있었다. 초딩의 마음 속 열정에 불이 붙은 순간이었다.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심장이 두근거리고 어깨가 들썩거리는 일이기에. 마침 집 앞에 음악학원이 있었고, 이 년 정도 기타를 배웠다. 어리고 작은 손으로 코드를 집는 건 쉽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오후 다섯 시의 나른한 분위기, 부드럽게 울리는 레슨생 언니 오빠들의 기타 소리, 그리고 매번, 학원에 있는 시간마다 자전거를 타고 창문 앞에서 장난치던 우리반 남자애. (그 아이 때문에 오래 다녔나) 그러나 끝내 기타는 오래가지 못했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의 손으로 쓴 장래희망 우드 판에는 ‘타 투 이 스 트’ 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머리를 짚었다. 그야 지금은 타투이스트가 직업으로써 만연하지만, 당시에는 매우 마이너한 느낌이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래퍼’라고 적었던가. 다들 웃겠지만 진심이었다! 초등학교 졸업반이었던 난 고등래퍼를 보며 고등학생의 꿈을 키워갔다. 모든 여자아이들이 한 번쯤 꿈꾸던 아이돌도 아니고 래퍼라니, 지금 생각해보면 특이한 아이였다.
중학생 때는 디자인고등학교로 진학하겠다고 난리쳤다. 테일러 숍, 그러니까 맞춤정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굳이 왜 맞춤정장이었느냐 묻는다면 답은 하나였다. '멋있으니까!'. 선생님과 부모님은 거리, 대학 문제 등으로 인문계 진학을 권했지만, 나는 이미 마음 먹은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끈기였고 나쁘게 말하자면 고집이었다. 아니, 고집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에 가까웠다. 결국 미술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친구는 고맙게도 생활기록부를 도와준다며 함께 그림 동아리를 개설해줬다. 이후 나와 친구, 부장이 두 명인 체제로 그림 동아리 활동을 했다. 동아리 이름은 트래비스 스캇 노래 이름인 <식코 모드>. (부장 둘 다 외국 힙합에 푹 빠져 있었기에) 후보군에는 에이셉 라키의 <배드 컴퍼니>도 있었다. (이건 지금 생각해보면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나 어느날 보았던 동아리 모집 리스트에 올라간 우리 동아리 이름은 <그림 친구반>이었다 하더라…
감사하게도 맞춤정장을 하겠다는 내 각오를 신선하게 받아들인 것인지, 성공적으로 디자인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인문계 고등학교로 편입했다. 서울에 있어 가는데 편도 두 시간 반이 걸리는 통학 시간, 코로나가 겹치며 반 년 동안 실습은 커녕 등교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계획했던 미래가 어긋나 떨어진 흥미 등 여러 상황들이 겹친 탓이었다. 그때의 난 마치 실패자 같았다. 그러나 그저 떠나왔다. 뒤돌아보기에는 늦었고, 애초에 내가 결정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발판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다시 예술로
고등학생 때부터는 기억이 흐릿하다. 코로나로 인한 외부와의 단절도 있겠지만, 꽤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모든 게 내 손에 달려있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인문계에 온 뒤로는 예술 쪽은 하지 않으리라 결심했었다. 그렇게 공부를 이어가다, 결국 나는 또 다시 한 예술에 빠졌다. 무속음악이었다. 우연히 들었던 김석출 선생님의 동해안 별신굿은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이유는 여전히 단순했다. 멋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멋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입시를 시작헀고, 그렇게 나는 대학교에서 한국예술 전공을 하게 된다.
지금은 스물 두 살. 이 글을 적는 기점으로 올해도 거진 한 달 반 밖에 남지 않았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얘는 하고 싶은 게 매번 바뀌네?’.
맞다. 이 역시 나를 대변하는 말이다. 난 항상 변덕스럽고, 막무가내에다 멋있는 걸 좋아한다. 그럼에도 어떡해, 그게 난데!
모른다. 수 년 후의 나는 되도 않는 그림실력으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우길지도, 듣는 것밖에 못하는 두 귀로 음악을 하겠다고 소리칠지도, 결국에 다시 펜을 잡을지도.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그 모든 모습이 전부 나라는 것이다. 나에게서 예술을 뺀다면 남는 게 있을까?
아트인사이트 지원서를 작성할 때, 문화예술은 ‘점’이라고 했었다. 사람 몸에 있는 점. 모두에게 있기도 하고, 눈에 보이기도 하지만 있는지 모를 때도, 혹은 생겨나기도 하는 그런 점. 그게 나에게는 문화예술과 비슷해 보였다. 문화예술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생각보다 가까이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나 역시도 그렇다. 나에게 문화예술이란 얼굴에 다닥다닥 난 점이지만, 시간이 들고 세월들을 맞닥뜨린다면… 어느순간 점보단 눈이 보이고, 코가 보이고, 입이 보이고, 주름이 보일지도. 그렇게 된다면 점 같은 건 내 시야에서 옅어지겠지.
그렇다 한들 있다. 결국엔 나에게 있는 존재다. 옅어진다 해도 결국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그런 게 나에게 예술이다. 그래서 나를 소개할 때에, 예술을 빼 먹을 수가 없다. 외동이었던 나에게 생긴 쌍둥이 동생 같은 존재기에. 울 때는 글로, 웃을 때는 음악으로, 지루할 때는 만화로 내 곁에 있어 준 아이니까.
이쯤에서 자기소개를 마친다. 내 이야기를 어디서 이렇게 해 볼 수 있겠는가. 속이 후련하고 즐겁다. 그럼 앞으로도 나랑 계속 해먹어나가자. 잘 부탁해, 쌍둥이 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