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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베르나르디노 루이니, 막달라 마리아의 회심, 패널에 유채, 1520년경, 64.77 cm x 82.55 cm, 샌디에이고 미수.jpg

 

 

취향은 좁아지는 게 아니라 확장되는 무언가다.


보통 사람들은 나이가 들거나 경험이 쌓일수록, 좋아하는 것만 더 고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선호는 더 정교해지고 분명해지지만, 동시에 더 많은 세계를 이해하고 경험하려는 폭도 넓어지기 때문이다. 음악 취향을 예로 들어보자. 처음엔 그냥 ”록이 좋아“라고만 하다가도, 디깅을 거듭할수록 록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하위 장르들을 알게 된다. 누군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비슷한 결을 가진 다른 장르까지 손을 뻗게 된다. 취향이 세분화되면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접하게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이처럼 한결같은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닫혀있지 않다. 아는 게 많기 때문에 더 많은 문을 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깊게 빠져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매몰되어 있다고 표현하기 쉽다. 필자 역시 그랬다. 타고난 홍대병 기질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언제나 추상미술만큼 내 마음을 울리는 화풍은 없었다. 추상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아니, ‘사랑한다’기보다 고집에 가깝게 굳어져 버린 선택으로서 다른 미술사조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세상의 귀하다는 고전 명화들을 실물로 보더라도, 국립현대미술관의 익숙한 한국 추상 작품이 내 마음을 더 크게 울렸다. 그래서일까. ‘내 취향은 여기까지’라는 생각을 핑계 삼아, 어느 순간부터 전시를 찾아가는 발걸음 자체를 멈춰버렸다.


그런 내게 이번 가을, 세종미술관에서 열린 《르네상스에서 인상주의까지: 샌디에이고 미술관 특별전》은 무심한 마음을 다시 붙들어 끄는 전시였다. 1925년 개관 이후 단 한 번도 해외로 반출된 적 없던 샌디에이고 미술관의 주요 컬렉션이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서울에 왔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큰 충격은 이 전시가 보여준 600년 서양 미술의 흐름이었다. 종교적 서사로 가득 찬 르네상스에서 인간 감정을 극적으로 끌어올린 바로크를 지나, 빛과 색채의 탐구가 중심이 된 인상주의와 실험적인 근대 회화까지. 작품들은 개별적으로도 강력하지만, 시간의 맥락 속에서 조명될 때 더욱 입체적인 감상을 선사했다.



고야,아라곤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1795년경, 108.27 cm x 82.55 cm, 샌디에이고 미술관.jpg

 


미술사조는 ’시대의 눈’이라는 말이 있다. 그 시대의 그림이란, 당대의 사람들의 시선과 사고방식의 집합체라는 것이다. 때문에 오늘날의 예술처럼 파편화된 장르 중 하나로 미술사조를 바라본다면 아무리 유명한 작품이라도 그 무게감이 적게 느껴질 수 있다. 그동안 필자에게 서양의 명화들, 특히 르네상스나 바로크 미술이 그다지 감동적이지 않게 다가왔던 이유 역시 비슷하다. 직관적인 감각에 의존한 감상을 즐겼던 내게 르네상스 미술은 “한결같이 종교화 뿐”이라는 무심한 한 줄, 바로크 미술은 “그림 속 인물의 눈을 쳐다보게 된다”라는 단순한 감상이 전부였다.


이날만큼은 달랐다. 앞서 언급했듯 필자에게 르네상스나 바로크 화풍은 ‘감상할 수 있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영역에 가까웠다. 하지만 루벤스의 영원의 우화, 고야의 아라곤의 초상을 마주하는 순간 내 오래된 확신이 흔들렸다. ‘내 취향은 여기까지’라고 스스로 정해두었던 선이 의외로 쉽게 지워지는 경험이었다. 특히 바로크 섹션을 지나며 이번 전시는 단순히 거장의 명화를 확인하는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루벤스의 영원의 우화는 습작에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성스러움을 풍겼다.


모네와 뒤피는 그저 아름다웠다. 심오한 관찰을 하지 않더라도 아름답다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는 화풍이 바로 인상주의가 아닐까 싶다. 찰나의 감각에 의존한 감상을 즐겨온 내게 인상주의 화풍이 바로 다가왔던 건 인상주의 작가들이 빛이 만들어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고자 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클로드 모네, 샤이의 건초더미들, 캔버스에 유채, 1875년, 30.16 cm x 60.48 cm, 샌디에이고 미술관 -1.jpg

  

 

전시장을 나서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특정 시대의 그림이 유난히 와닿는 순간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과 아주 미세하게나마 비슷한 감각을 공유하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한 건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천천히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전엔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르네상스나 바로크, 로코코의 그림들이 갑자기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도 아마 그 변화의 징후일 것이다. 그 시대의 미술은 이미 현대인에게도 충분히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는데, 내가 아직 그 문을 열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취향이란 결국 스스로 확장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다른 세계와 맞닿는 감각인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는 내가 외면해온 시대와, 그 시대의 사람들과, 그리고 지금의 나 사이에 아주 조용한 공명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일러주었다. 그래서 더 이상 ‘내 취향은 여기까지’라는 말로 나를 가두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이제야 비로소, 더 넓은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샌디에이고 메인포스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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