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 강유원, 『책과 세계』(살림, 2004)
독서와 관련한 수 없는 밈들이 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문장이 참 적절할 것이란 생각을 했다.
나는 굳이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말이 싫다.
왜냐하면 문제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독과 우울, 상념과 치료되지 않는 내 안의 그 모든 것. 그것은 나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내부에서 피어나 나와 함께하는 감정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단순히 아픈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언젠가 모두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모두가 병들고 죽게 되니까. 언젠가는.
살아있음이란 점차 병들어가는 것이고, 그 내부의 병은 내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끝내 실마리도 없이 나와 삶을 집어삼킨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를 한다.
힐링을 하기 위해서, 예쁜 말들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들어 있는 나를 책이라는 외부에서 다시금 재발견하고 나의 고통을 재인식하고 재이해하는 것이다. 수잔 스캔런의 『의미들』 역시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면서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들도 왜 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자신에게조차 미지의 존재다.
- 80p
난 한 번도 미친 적이 없지만
이 책은 수잔 스캔런의 정신병동 장기 입원과, 그 전후를 문학 읽기로써 이겨낸 회고록이다. 소개되는 소위 '미친 여자들'이라고 불리는 불후의 여성 작가들의 책을 소개하고 이에 대해 비평하는데, 소개되는 작가와 그들의 저서 역시 한 번씩 읽어보기를 매우 추천한다.
스무 살에 뉴욕의 대학으로 온 스캔런은, 마음의 병으로 인해 제대로 음식을 먹지도 못하고, 누군가와 대화하지 못하는 생활을 하다 결국 정신병동에 입원하게 된다.
당시는 '되찾은 기억'이라는 개념이 정신 의학에 있어 방법론으로 주목 받던 시기였다. 의사들은 그에게 그의 삶을 되짚어 '트리거'가 되었을 만한, 트라우마들을 캐내려하고, 화학적인 불균형을 치료할 만한 여러 약물을 처방했다. 그러나 그 시간과 처방은 스캔런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혼돈과 해체에 대항하는 나날의 어떤 몸부림들을 담아두는 방식. 허마이어니 리는 정말 훌륭한 버지니아 울프 전기에서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공포가 광기와 글쓰기를 연결한다고 지적한다. 나는 이 말이 그 시절 나의 자아 감각을, 내 의사소통 능력의 한계를 설명해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것은 내 글쓰기가 절박함과 광기에서 연료를 공급받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내 강점의 깊이를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으리라는 것,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 너무나 멀리 외떨어져 있다는 느낌. 이게 내가 미쳤던-그때 내 상태가 정말로 미쳤던 거라면-이유라고 생각한다.
- 65p
단순한 질환의 진단, 약물 치료만으로는 내 안의 고통에 도달할 수 없다. 마음이 아픈 이유는 몸의 문제와 살아온 삶에 함께 있으니까. 한쪽만 치료해서 나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대신 그는 문학에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광기를 품은, 미친 여자들이 쓴 책. 그들이 살아온 삶의 여정과 문학 속에서 느껴지는 그 절절함. 그것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치료가 아니라, 이해하고 공존하길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광기를 그려내는 여자들, 그것을 써내고, 표현하는 여자들.
스캔런은 그 속에서 위로받는다.
내 인생은 일찌감치 너무 늦어버렸다.
이 문장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대표작 『연인』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어떤 책이 보이거나 생각날 때, 아, 한때 내게 큰 의미를 지녔었지, 하고 말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연인』같은 책들도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이 책이 없었다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 모르겠다고. 내 인생의 그 시기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 87p
어떤 책들은 스캔런의 말처럼, 나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그런 건 일생에 몇 없는 행운이다. 그때의 나를 지지해주는,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을 것 같은 나를 이해해주는 등대 같은 책이니까.
스캔런에게 하필 뒤라스의 『연인』 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 재밌는데, 욕망과 삶, 사랑과 정열이 뒤섞인 그야말로 재앙처럼 아름다운 소설이기 때문이다.
뒤라스는 내게 사별의 슬픔과 성적인 각성의 연관을 보여주었다. 화자가 이 시기에 관해 한 말-뒤라스는 내게 사별의 슬픔과 성적인 각성의 연관을 보여주었다. 화자가 이 시기에 관해 한 말-내 인생은 일찌감치 너무 늦어버렸다-의 공간. 이제야, 일흔에야 작가는, 저자는, 화자는 자기 삶에서 이 시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청춘을. 그때는 그걸 표현할 언어를 갖지 못햇다. 그것이 인생이었다는 걸.
- 88~89p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1914년생의 프랑스 대표작가로, 누보로망의 대표 작가이자 극작가, 영화 각본가이기도 하다. 『연인』은 그의 자전적 소설로, 인도차이나의 프랑스계 소녀가 부유한 중국인 남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내용의 소설이다. 욕망과 주체성, 기억과 언어에 대해 말하는 책인데, 이 책을 읽고 관심이 생긴다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 동제의 영화로도 상영되었다.
그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독자가 열려 있을 때, 목소리와 가능성을 필요로 할 때 가능해지는 수용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 읽기는 내 삶을 적극적으로 다시 쓰는 한 방법이 되었다.
중요한 건 특정성이다. 아무 여자가 아니라 나, 당시 나였던 존재의, 나의 특정성. 젊었고, 나로서는 이름 붙일 수도 분간할 수도 없었던 수치와 자기혐오로 가득했던 나에게는 언어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내 성격, 이미 닫혀 있었고 자신을 보호하려고 스스로 닫아걸었던 나의 성격-아무도 자기를 알 일은 없을 거라 확신했고, 이미 자기 삶의 한계들을 알고 있던 그 여자의 성격. 그 여자에게 그 책은 자신을 알아갈 방법, 자신을 표현할 언어, 하나의 선물이었다.
- 91p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읽고 여태 늘 무욕하던 화자가 욕망을 갈망하게 되었다는 것이 아름답다. 위의 인용문에서 스캔런이 지칭하는 '그 여자'는 『연인』을 읽기 전의 자신이며, 이 책을 만나 완전히 달라진 자신이다.
스캔런이 책과 자신의 관계를 얘기하며 어떤 책들이 나에게 와닿는 건, 단순히 그 책이 가진 힘뿐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으며 스스로 선택한 결과라고 말해주는 것이 너무나 좋았다.
최근 지인과 아무리 명작이라 정평난 작품이어도, 그걸 보는 나와 타이밍이 무척 중요한 것 같다는 대화를 했었다. 스캔런 역시 이 책에서 연장을 들기로 선택한 건 자기자신이기에 그러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얘기를 한다.
그가 실비아 플라스와, 버지니아 울프, 오드리 로드, 쥘리아 크리스테바, 재닛 프레임과 공명한 것 역시 그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미친 여자'라는 말은 일종의 멸칭적인 단어지만, 자신 안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 속의 나와 손 잡고자 하는 일종의 시도이다.
그런 긴 여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