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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살리에리 증후군
세상에서 오로지 나만 아는 게 있다면. 남들도 알아줬으면 하는데 아무도 모르는 게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
연극 <아마데우스>는 18세기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오스트리아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 그리고 동시대 음악가 ‘살리에리(1750~1825)’가 라이벌로 나오는 이야기다.
‘살리에리 증후군’(‘주변의 뛰어난 인물 때문에 느끼는 열등감, 시기, 질투심 등의 증상을 이르는 말’ - 네이버 지식백과)이란 단어가 있을 정도로 살리에리는 질투심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가 질투하는 대상은 신동이자 천재 모차르트다. 그들의 삶을 각색한 영화이자 이 극이 원작으로 삼고 있는 영화 <아마데우스>(1984년)에서 비롯된 말이긴 하나, 그 영화에서 살리에리의 질투심이 얼마나 구체적이면 실감 났으면 그렇게 증후군으로 남았을까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관객에게 말을 걸며 시작되는 이야기
극은 노년의 살리에리(권율 배우)가 휠체어를 밀고 나오면서 시작한다. 자정을 알리는 괘종소리가 울리자 그는 자신이 내일 자결할 거라 말하며 종이 여섯 번 더 울리기까지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관객에게 간청한다. 여기서 관객은 알게 된다. 살리에리가 극 내내 소통하는 대상은 관객이라는 것. 관객인 우리가 살리에리의 관점을 통해서 이 이야기를 바라보게 될 거란 걸. 들어줄 수 있을 뿐 결코 답해줄 수 없는 신의 입장에서 우리는 살리에리의 이야기에 귀기울이게 된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첫만남
가난한 시골 출신이었던 살리에리는 어느 날 들판에서 신께 맹세한 뒤로 금욕적이고 독실한 신앙심을 갖고 살며 부단히 노력해 궁정 음악가로 거듭난다. 그렇게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 아래서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 빈에 황제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네 살 때부터 작곡을 시작해 일곱 살에 유럽 전역에 연주 투어를 떠났고, 여덟 살엔 교향곡까지 작곡했다던 신동 모차르트가 고향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를 떠나 예술의 중심지인 빈에 오기로 한 것이다.
그가 천재라는 이야기에 긴장이 된 살리에리. 그러나 막상 만난 모차르트는 천박하고 저질스러운 남자애였다. 연인 ‘콘스탄체’와 음담패설을 쉴 새 없이 주고받으며 실실 웃다가, 갑자기 결혼을 선언하는 모차르트. 살리에리는 그의 품성을 보고 당황한다.
그러나 황궁에 초대된 날 모차르트가 보여준 실력은 듣던 대로 놀라웠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위해 작곡한 연주곡을 모차르트가 지루하다 평하더니 그 자리에서 여러 변주를 곁들인 즉흥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것이다. 요제프 황제는 모차르트의 실력에 흡족해하며 오페라를 작곡할 것을 부탁한다. 모차르트는 엄청난 자신감으로 이미 다 완성한다고 말한다.
그때 올린 게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이다. 흠잡을 수 없는 완벽한 무대였는데, 살리에리는 경악한다. 아리아를 부르는 여자가 제자이자 정부였던 ‘카테리나’였기 때문이다(정부를 두고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하는 게 지금 기준으로 보면 참 이상하다). 공연이 끝난 후, 모차르트가 황제의 감상을 묻자 음악에 흥미를 보이긴 하지만 조예가 깊진 않았던 황제는 살리에리에게 대답을 떠넘기고, 살리에리는 다 좋은데 음표가 많았다는 이상한 비판을 한다. 황제도 그의 말을 수긍하는 체하며 모차르트를 독려하고 떠난다.
검은 욕망에 눈 뜨는 살리에리
살리에리의 질투는 그때부터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모차르트는 그 뒤 콘스탄체와 결혼하고 여러 연주회를 거듭하며 유명 인사가 된다. 하지만 수없이 여자들을 만나고 술을 퍼마시는 방탕한 생활로 돈을 펑펑 써서 재산을 축적하지 못한다.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아들 모차르트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콘스탄체와 결혼한 걸 듣고선 재정적 지원을 끊은 듯하다. 콘스탄체가 그런 일 때문에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된 살리에리의 마음속에 불쑥 이상한 욕망이 솟는다.
모차르트의 집에 놀러 간 살리에리는 모차르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콘스탄체에게 접근한다. 한 귀족이 음악 선생을 구하고 있다는 얘길 하고 그 일에 대해 논의하자며 그녀를 자신의 집에 부른 것이다. 모차르트가 연주회를 간 사이, 모차르트의 악보를 들고 살리에리의 집에 찾아온 콘스탄체. 그녀는 살리에리와 이야기하다 그의 검은 욕망을 재빠르게 알아채고 마음껏 비웃으며 거절한 뒤 떠난다(잘했다 잘했어!).
신을 적으로 규정하는 살리에리
홀연히 남겨진 살리에리. 지금 자기가 뭘 하려 했는지 비로소 깨달은 것처럼 놀라워하며 이 질투심 어린 욕망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다 콘스탄체가 놓고 간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게 된다. 너무나, 너무나 완벽하다. 흠잡을 데가 없고 무엇보다 아름답다! 어디서도 이런 악보는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악보의 주인공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나 내 길을 막고 있다. 모차르트의 재능에 압도된 살리에리는 급기야 신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권율 배우가 살리에리로 분했는데 이 장면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울부짖고 무대 바닥을 두드리고 뒹굴고 목에 건 십자가 목걸이를 벗어 던지며 그는 외친다. 굳건히 맹세한 뒤로 그토록 금욕적이고 신실한 생활을 해왔는데도 자기의 음악적 재능은 보잘것없을 정도로 평범하다고.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죠.” 그는 신이 음악적 재능이 아니라 그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을 준 게 아니냐고 묻는다. 울분과 혼란, 외침과 조소. 그 어떤 부르짖음에도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신을 영원한 적으로 규정한다.
몰락하는 자
이 장면에서 문득 최근 흥미롭게 읽은 한 소설이 떠올랐다.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그러나 조국을 미워하는 글을 쓴 ‘토마스 베른하르트(1931~1989)’의 장편소설 <몰락하는 자>다.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실존 인물이다)’ 때문에 무너지게 된 그의 친구 ‘베르트하이머’와 화자의 이야기다(그들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음악학교인 ‘모차르테움’에서 만난 사이로, 셋이 서로 친구 사이지만 글렌 굴드의 천재적인 <골드베르크 변주곡>(바흐의 작품) 연주를 듣고선 둘 다 피아니스트가 되는 걸 때려치운다. 소설은 굴드의 천재성과 성공에 대해 논하다가 점점 그에 의해 무너져 자살하고 만 친구 베르트하이머의 삶과 그가 죽기 전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화자의 이야기로 기운다. 소설은 첫 문단을 제외하고는 문단 구분이 전혀 없고, 마치 돌림노래처럼 같은 진술이 반복, 변주된다. 그토록 집요한 문장들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건 강한 질투심과 평범하다는 쓰디쓴 패배감이다.
재능과 노력의 차이, 그럼에도
그래서일까, 살리에리의 외침에 나는 강하게 몰입했다. 생각해 보면 재능이란 천부적이다. 노력은 후천적이다. 노력은 값지긴 하지만 재능은 빛이 난다. 노력이 계단이라면 재능은 엘리베이터다. 노력하는 사람은 단계에 대한 예민한 거리 감각을 통해 너무 높은 곳에 ‘이미’ 있는 천재를 직감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렇듯 노력은 시선을 외부로 돌려 양팔 저울에 자신을 올려놓는 순간 더없이 가혹해진다. 그런 기로에 서 있다면 천재를 흔쾌히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아 노력해야 할 테다. 천재에게 박수를 짧고 굵게 보낸 뒤 자신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천재에게 감탄하고 시기하며 시간을 쓰는 게 내 삶에 부당한 일이란 걸 안다면 말이다.
굶어가는 모차르트
살리에리는 그러지 않는다. 2부에서 그는 궁정 음악가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모차르트라는 천재를 굶겨 죽이겠다고 아주 악독하게 결심한다. 그는 콘스탄체의 부탁을 무시하고 모차르트 대신 형편 없는 음악가를 귀족의 음악 선생으로 추천한다. 모차르트나 콘스탄체나 황궁의 내막을 알 수가 없다는 걸 이용해, 그들 앞에서는 안타깝다는 식의 값싼 위로를 건네면서.
그런 식의 가스라이팅은 모차르트가 죽기까지 십여 년 내내 통한다. 모차르트의 자유로운 음악은 보수적인 빈의 분위기에 맞지 않아 주목받지 못하고, 살리에리의 음악이 대신 주목 받는다. 살리에리는 궁정 악장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미들네임인 ‘아마데우스’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 것처럼 모차르트에게 뜻밖의 도움의 손길이 가닿기도 한다. 백작을 골탕 먹이는 내용인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못마땅했던 궁정 음악단 사람들이 3악장에서 당시 황제가 금지한 발레풍이 쓰이고 있다며(배우들이 추는 춤이 발레일 뿐이지 법을 어긴 건 아니라고 모차르트가 설명함에도 불구하고) 악보를 찢어버린 적이 있는데, 리허설을 불참하기로 했던 황제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연주 없이 춤만 행해지는 기괴한 3악장을 보고선 화를 내며 복원을 명명한 것이다.
그런 도움으로 모차르트는 <돈 조반니>, <코지 판 투테> 같은 명작을 올린다. 그럼에도 생활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황제는 임금을 주기로 하는데, 살리에리와 조율해서 아주 약간의 돈만 주기로 한다. 살리에리는 그런 식으로 모차르트를 굶기고 굶긴다. 어떤 잔혹함은 치밀한 계획 속에 단번에 숨통을 끊어버리지만 어떤 잔혹함은 속을 좀먹는 식으로 천천히 숨통을 옥죄어온다. 살리에리가 택한 후자의 방식이 더더욱 잔인하게 느껴진다. 죽음을 결정짓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결정짓는 방식 같아서.
아버지의 죽음 이후 급격하게 악화되는 모차르트
사실 1부에서 살리에리의 질투의 배가 확실하게 띄워졌기 때문에 2부에서 그것이 어디로 갈지는 명백해 보이는 상황이다. 2부에서 중요해지는 건 모차르트다. 1부에서 수다쟁이에다가 천박한 남자로 각인되었던 모차르트(“나는 입을 꿰매버려야 해요.”라고 몇 번을 말한다.)는 2부에서 살리에리의 이런 방해로 인해 가난해지면서 활기를 잃어간다.
불운이 더 큰 불운을 몰고 오는 것처럼 모차르트에게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모차르트는 충격에 빠지고 어린 시절 자신을 고되게 연습시킨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그리움, 아버지의 허락 없이 콘스탄체와 결혼해 버리고 아버지와 왕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함 사이에서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이때 나오는 음악이 <반짝반짝 작은 별>이란 제목으로 잘 알려진 <“아, 어머니께 말씀드릴게요” 주제에 의한 12개의 변주곡 C장조 K.265>이다). 그렇게 모차르트는 주눅 든 아이처럼 활기를 잃고 돈에 시달리는 비운의 천재, 신이 보살피긴 하지만 인간은 주목하지 않는 가난한 음악가가 되어간다.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이 찾아오며
그때 모차르트에게 이상한 제안이 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 그를 찾아와 레퀴엠(진혼곡)을 지어달라 의뢰한 것이다. 누군가의 모습이 너무도 험해 충격을 받은 모차르트. 꿈에 그 사람이 나온다며 모차르트는 괴로워한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콘스탄체마저 고향으로 떠나 혼자가 되어 작업을 이어 나가는 모차르트의 모습은 그 쾌활한 천재가 맞는지 싶어진다.
살리에리는 비운으로 기울어가는 모차르트를 관찰하며 지내다가 마치 이웃 사람처럼 나타나 몇 번 이야기를 나눈다. 병이 든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만이 자기를 좋아한다며 그에게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는다. 서민극장에서 의뢰한 작업 <마술피리>도 진행 중이긴 한데 선금은 없고 공연 후에 값을 받는다는 얘기도 한다. 돈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그게 아니면 돈벌이가 아예 없기에 모차르트는 수긍하고 약속 날짜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의뢰자가 남들에겐 비밀로 해달라 했던 레퀴엠 이야기도 한다. 살리에리는 그 이야길 들으며 모차르트의 무너짐을 확인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오페라 <마술피리>. 서민극장은 대중극장에 속해 귀족이 꺼리는 곳이었지만모차르트의 음악이 가진 아름다움을 알았던 살리에리는 그 공연을 보러 간다. 공연에서 그 유명한 <밤의 여왕> 아리아가 울려 퍼진다. 그토록 뛰어나고 휘몰아치는 음악인데도 모차르트가 처한 상황들을 생각하면 사뭇 슬프게 들려온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죽음을 앞둔 그들의 처음이자 마지막 협업
불길한 예감대로 돈을 한 푼도 못 받고 레퀴엠 작업만 남은 모차르트. 병이 악화되어 제대로 악보를 그리지도 못하게 된 차에 살리에리가 찾아온다. 마치 1부에서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았던 때처럼 레퀴엠 악보를 보며 놀란 살리에리는 그때와 달리 모차르트가 그 뒤에 이어질 악상들을 말하기 시작하자 악보에 미친 듯이 옮겨적기 시작한다. 이 장면이 2부의 핵심 장면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피아노 위에서 엎드렸다가 굴렀다가 누웠다가 하며, 피아노에 기대었다가 휘청였다가 하며 레퀴엠을 같이 집필해 나간다. 한 명은 끊임없이 말하고 나머지 한 명은 끊임없이 받아적고. 피아노, 음악이 그들의 모든 기준이 된다.
그렇게 몰입에 젖어가던 그 순간, 살리에리에게 어떤 답이 찾아온다. 죽은 자를 위한 노래 레퀴엠이 누군가가 의뢰한 거라는 아이러니를 곱씹던 살리에리는 그 레퀴엠이 신에게 찬사를 보냈던 자신의 파멸을 노래하는 거라고 깨닫고 뉘우친다. 그가 칼끝에 묻혀 찔러댔던 독은 모차르트와 자기 자신 모두에게 묻었던 것이다. 살리에리는 마치 신에게 비는 것처럼 무릎 꿇고 모차르트에게 용서를 구한다. 그러나 모차르트는 질겁하면서 살리에리를 피한다. 결국 용서받지 못한 살리에리가 그의 집에서 떠나면서 모차르트는 미완성 유작 레퀴엠을 남겨두고 죽음을 맞이한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라크리모사>가 장엄하게 울려 퍼진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상황, 죽음 그 자체가 노래 속에 깃들어 울고 있는 듯하다.
그의 죽음 후, 아내 콘스탄체가 분발해 악보를 판매하면서 서서히 온 거리에 모차르트의 노래가 울려 퍼지게 된다. 천재는 그런 식으로 사후에 명성을 떨치게 된다. 살리에리는 어디서든 모차르트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가 죽은 뒤에 계속 그런 삶을 살았다고 말하며 이야기를 마친다.
살리에리의 거짓 고백
이야기마저 끝마쳐 죽음만을 앞둔 살리에리는 대뜸 고백한다. 모차르트가 실은 독살되었으며 살인범은 나라고. 그는 왜 그 긴 이야기 끝에 거짓 고백을 한 걸까.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죄책감의 고백인 동시에, 사후에도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기억되기 위한 비겁한 계획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음날 뉴스 기사에 그의 죽음과 그의 유언이 공개되지만, 사람들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그의 말을 비웃는다. 살리에리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설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빠르게 잊힌다.
이제 그는 관객 앞에 유령으로 나타나 말한다. 용서를 구한다고. 당신들도 용서받고 싶다면 내가 그 용서를 들어주겠노라고. 그는 무대를 벗어나 관객석 사이를 조용히 가로지르며, 용서를 중얼거리며 사라진다.

욕망과 파멸의 이야기
결국 이 이야기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였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나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지 못했으며 다름을 수준으로 곡해하고 부정적인 방식으로 욕망을 추구했던 한 인간의 파멸에 대한 이야기. 그가 만일 모차르트를 오롯이 인정하고 같이 동료로서 음악을 해나갔다면 어땠을까. 아름다움을 알아챌 수 있는 예민한 귀와 눈을 가진 그가 자신의 입으로 그 아름다움을 퍼뜨렸다면 어땠을까. 그랬어도 그가 불행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인간은 신과 달리 절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몰락하는 자>가 천재 굴드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금세 몰락한 이들의 이야기로 변주되어 그 얘기를 아주 길게 하며 끝나는 것처럼. <아마데우스>가 천재 모차르트가 아닌 실패자 살리에리의 이야기였던 것처럼.
실패의 인간다움
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실패에서 인간을 보았던 것 같다. 실패에서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해진다. 실패가 아무리 추접하고 절망적이어도 무시하고 부정할 순 없다. 나에겐 밑바닥을 알지 못하는 상태가 실패하는 것보다 더 처참하게 느껴진다.
살리에리는 신을 향해 질문했지만 결국 대답하는 건 본인, 인간이었다. 우리는 그의 질문과 대답 사이의 떨림과 짙어져 갔던 절망에 귀기울여야 한다. 누구에게나 천재의 군림처럼 압도적으로 닥쳐올 현실이 있을 터인데, 이 치열한 극이 현실에 대한 대비책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