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너무 당연한 말들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가령 평소에는 당연하게 입속에서 굴리던 단어들이 꺼끌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라던가. 흔히들 이런 순간을 ‘게슈탈트 붕괴’라고 일컫는데, 굳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문득 모든 게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분명히 평생 쓰고 말해온 언어인데, 이럴 때면 그냥 좀 익숙한 외국어처럼 느껴진다.
이 책에서는 마치 ‘안녕하세요’와 같은 이치다. 한국에서는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들리면 상대도 ‘안녕하세요.’ 하고 답한다. 그 뒤에는 어떠한 악의도 선의도 없다. 그냥 예의다. 그러나 책 속의 주인공은 이 단어를 외국인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했고, 뜻이 뭐냐는 질문에 ‘Are you in peace?’라고 답했다. 나였다면 ‘Hi’, ‘Hello’와 같은 뜻이라고 답했을 텐데, 왜 이렇게 직역했는지는 당연히 모르는 일이다. 그 순간 나는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생전 처음 듣는 발음의 외계어처럼 느껴졌다.
평생 써온 언어도 이렇게 한순간 낯설어진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어떤 한 행동을 계속하다 보면 익숙하고 완벽해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한국인이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며 외려 ‘완벽’과 멀어지는 이야기다.

잘 지내냐는 말은 무력하다. 정말로 잘 지내는 사람에게도, 실은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도.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잘 지낸다’라고 대답하는 것은 오히려 나의 진짜 잘 지냄에 관해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가깝다. 수업 시간 내내 ‘How are you?’와 ‘어떻게 지내요?’,‘I’m doing good'과 ‘잘 지내요’를 기계적으로 말하고 반복하고 따라 하게 하면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크고 분명하고 자신감 있어질수록, 나는 점점 더 그 언어가 갖는 본래의 의미와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 문지혁, 초급 한국어 中
‘초급 한국어’의 주인공 ‘문지혁’은 뉴욕에서 타향살이하며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작가의 꿈을 꾸는 작가 지망생이기도 하다. 그는 꿈을 좇으면서도 현실에 발붙이려 부단히 노력한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새로운 직업을 갖고, 새로운 집으로 이사하며 급작스레 다가온 삶의 변곡점을 마주한다.
당연히 뉴욕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입장에서 이 모든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는 꾸준히 주변인들과 교류하며 방법을 찾아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앞에는 자꾸만 방법을 모르겠는 일들이 생긴다. 학생들에게 시간을 말하는 법을 가르칠 때 ‘열 시’와 ‘십 분’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하기 위해 고민하고, 발 디딘 이 낯선 곳에서 불투명한 미래를 어떻게든 자꾸 덧칠해 보는 그런 일들이다.
외국어로 둘러싸인 낯선 곳에서 한국어를 쓰며 고군분투하는 이 한국인의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붕 떠 있는 사람일지 가늠하게 된다. 그에게 붙은 태그는 수도 없이 많았다. 잡히지 않는 꿈, 별안간 갖게 된 의외의 직업, 낯설어진 나의 모국어와 어머니. 그 사이에서 지혁은 그동안 자신이 써왔던 언어, 한국어를 기본부터 다시 되짚어보며 순간순간을 반추한다.
Be yourself, no matter what they say.
소설 내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지혁의 타지 생활 보다 보면 무심코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Sting의 ‘Englishman in New York’이다. Sting의 노래 속 주인공은 뉴욕에서도 영국식 홍차를 마시며 노래했다. 그런 그에게 이방인이란 정체성은 저항이자 당당함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이방인이란 정체성은 그의 선택이었지만 가끔은 EAD 카드 발급도 마음 편히 할 수 없는, 그런 골치 아픈 것이었다.
더불어 이 당당함도 지혁에게 있어서는 끊임없이 골머리를 앓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지혁에게는 좋은 글을 쓰고자 했지만 딱히 큰 반응을 끌어낼 수 없었기에 어떻게 작가의 길을 열어야 하나 고민하던 나날들이 있었다. ‘좋은 생각’에나 실릴 것 같고, 반듯한 게 탈이라는 그의 글을 향한 평가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그럼 앞으로 비뚤어지겠습니다.’ 몇몇은 웃었지만, 그 평가를 내려준 소설가 선생님은 다시 이렇게 답한다. ‘반듯한게 어때서요, 라고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Sting이 노래한 ‘legal alien’이란 말은 어쩌면 농담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문지혁은 언제든지 ‘legal’이란 꼬리표조차 떨어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위치였다. 고독은 이렇게나 양면적일 수 있다. 당당한 ‘Englishman’보다 더 자신을 입증하기 힘들었던 ‘Hangeulman’은 그 속에서 조용히 고민한다. 이 변곡점에서, 인생이란 항해에서 뱃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할지 끝없이 재고 또 잰다.
그러나 제일 치열한 전투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소설 속에서 지혁의 하루하루는 잔잔하게 흘러간다. 일상이라는 사투 속에서 지혁이 살아가는 모습은 여느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나랑 비슷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덕분에 독자들은 지혁의 이야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고, 지극히 보편적이면서도 입체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서울은 저기 아시아의 변방에 있는. 아니 대개는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미지의 동네이고, 서울을 설명하기 위해 ‘코리아’를 불러오는 순간 나는 어느 쪽에서 왔는지를 한 번 더 말해야만 하는 나라의 국민이 된다.
“노스 오어 사우스?”
ROK와 DPRK 사이, 서울과 뉴욕 사이, 태평양과 대서양 사이.
나는 서울을 벗어나서야 서울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는다.
비로소 서울을 그리워하는 법을 배운다.
- 문지혁, 초급 한국어 中
결국 그에게 있어서 한국어를 다시 가르치는 이 시간은 그가 다시 고향과, 그리고 인생과 친밀해지는 시간이 된다. 이방인이었기에 말할수록 그리워지는 그 이름들과 시간을 곱씹으며 무엇을 선택해야 후회가 없을지 계속해서 생각한다. 한국어는 그 고민과 결정의 기로에서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을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마치 우리가 세상을 알기 위해 처음 떼었던 ‘가나다라’처럼.
그리고 그 종착점은 여지없이 ‘안녕’이다. ‘Peace.’라고 말하자마자 누군가는 그게 인삿말이냐고 웃어댔지만 사실 모두가 바라고 있는 그 ‘안녕’에 대해 이 소설은 모두에게 되묻는다. 모두들 지금 안녕한지, Peace 안에서 살고 있는지 말이다. 익숙한 모든 것이 낯선 그곳에서도 ‘안녕’하다면야, 그것이야말로 다행이라는 듯이.
“인생 공부했다고 생각해, 잘 지내라.”
- 문지혁, 초급 한국어 中
모든 이야기를 읽고 난 후의 감상은 복합적이었다. 쓸쓸하고 허무할 정도였던 마지막, 그러나 절대 무가치하지 않은 여정의 괴리가 너무 현실적이라 그랬을까. 그를 응원하고픈 마음, 타박하고 싶은 마음, 그러나 절대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아 괴로운 마음까지 무슨 오미자차라도 마신 것처럼 온갖 감정이 느껴졌다. 소설 속 문지혁은 자신의 한국어 강의가 학생들에게 어떤 시간으로 기억될지 궁금해한다. 그럼 내가 이 책을 읽고 느낀 시간은 나에게 어떤 시간으로 기록될까.
평생을 같이했는데도 아직도 낯설고 초급인 것 같은 인생. ‘초급 한국어’는 그 미숙한 아름다움을 우리의 모국어 ‘한국어’와 함께 풀어냈다. 마침 익숙한 풍경이 낯설어지는 늦가을이자 초겨울인 요즘이다. 한날의 공기가 어딘가에도 발붙일 수 없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이라면 이 책과 함께 천천히 다음을 그려보는 건 어떨까. 우리의 안녕을 위해, 초급으로 돌아가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언어와 함께 걸어나가다 보면 다시 이 모든게 익숙해지는 나날이 올 것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