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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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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주인공 유령, 즉 에릭은 파리 오페라하우스 지하에 숨어 산다. 일그러진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그는 5번 박스석에서 무대를 지켜본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과 다름없는 그의 존재는 공포이며, 그의 음성은 소름 끼치는 소음이 되고, 그의 꿈은 세상에 드러나선 안 될 죄악이 된다.


세계 뮤지컬의 중심,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를 향한 청춘들의 꿈이 모이는 그곳엔 뮤지컬 배우를 꿈꾸던 두 청년이 있었다. 수많은 오디션에서 떨어지던 그들은 마침내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에 앙상블로 합격한다. 가족에게도 외면당하며 꿈만 먹고 살던 그들에게 그날은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잊지 못할 그날, 그들은 거짓말처럼 화재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자신들이 살던 아파트 528호에 갇힌 그들은 지박령으로서 죽은 채 살아간다. <오페라의 유령> 에릭처럼, 거기 있단 것만으로도 무서운 존재가 된 것이다.


초연 뮤지컬 <#0528>은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자 인간인 ‘에기’가 생전 뮤지컬 배우였던 지박령 ‘도리스’, ‘브랜든’이 13년째 살고 있는 아파트 528호에 이사 오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 판타지 코믹 성장극이다.


에기는 오디션에 합격해 첫 페이를 받으면 528호에서 나갈 테니 도와 달라고 하고, 도리스와 브랜든은 얼떨결에 멘토가 된다. 재능은 부족하지만, 그의 꿈은 유령들의 마음마저 움직인다. 학창 시절에 괴롭힘당한 트라우마로 무대를 더 두려워했던 에기는 성장하고, 지박령 도리스와 브랜든도 한을 풀며 그들 사이엔 끈끈한 우정이 쌓인다.


<#0528>은 코미디 장르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화재 사고, 가장 행복한 날에 맞이한 원인 모를 죽음, 이루지 못한 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두려움과 죄책감, 트라우마, 위태로운 젊음까지 여러 무거운 소재를 다루지만, 전개는 무겁지 않다.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처지를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자학하고,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간다.


하지만 극의 중반부가 넘어가며, 웃음으로 감춘 각자의 슬픔이 드러날 때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이들에게 딱 맞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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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보고만 있지 않는다. 도리스와 브랜든은 에기 몸에 빙의해 그를 괴롭히는 나쁜 기억들과 대신 싸워준다. 에기는 도리스가 그리워하는 사람을 대신 찾아주고, 도리스와 에기는 죄책감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브랜든을 끄집어낸다.


인간과 유령이란 전혀 다른 처지뿐 아니라, 도리스와 브랜든은 13년 전 유령이 됐기에 에기와 세대도 다르다. 까칠하고 직설적이며 욱하는 성격의 도리스, 눈치 없고 순진한 것 같지만 할 말 다 하는 에기, 유들유들하고 밝아 둘 사이의 중재자가 되는 브랜든까지 성격도 제각각이다. 이렇게 다른 이들이 뭉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간절함’이다.


에기는 자신을 괴롭히는 트라우마와 부족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오르겠단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도리스는 죽어서도 가족을 찾아 헤맸으며, 브랜든은 가장 가까운 이에게 더 큰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오랫동안 비밀을 감췄다. 이들은 간절하게 무언가를 원했고, 결말에선 셋 모두의 꿈이 이뤄진다. 진심의 힘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0528>은 2024년 화제작 <접변>의 제작사 포커스테이지가 만든 중국 라이센스 작품이다. 극 중 배경은 브로드웨이, 극 제작은 중국에서 이뤄졌기에 작품 색은 독특하다. 그 독특함은 무대와 연출, 조명에서 주로 드러난다. 예매 페이지엔 일부 장면에서 나타나는 반복적이고 번쩍이는 불빛으로 인해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트리거 워닝(사전 경고) 공지가 돼 있을 정도다. 조명을 쓰는 방식과 일부 장면 연출은 다소 낯설지만, <#0528>은 한국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보편성들을 충분히 갖고 있다. 넘버와 정서다.


댄스 장르의 밝은 넘버들도 극 분위기에 어울리지만, 세 인물의 속내를 그리는 잔잔한 솔로 넘버들이 귀를 사로잡는다. 에기의 꿈을 향한 간절함이 드러나는 ‘광대’, 도리스의 슬픔이 마음을 울리는 ‘내일’, 브랜든의 숨겨진 사연과 갈등이 담긴 ‘재 뿐이야’까지. 초연이고, 개막 초반이라 많이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임에도 깊은 감정은 관객을 몰입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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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와 메시지, 또 다양한 장르의 넘버로 보편성을 확보했다. 코미디와 감동의 완급 조절 또한 뛰어나 쉴 새 없이 웃기다가도 금세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든다. 그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코미디로 순식간에 장면을 전환한다. 배우들의 열연과 탄탄한 케미, 돌발 상황에도 천연덕스럽게 대처하는 순발력 또한 이미 훌륭하다.


도리스는 꿈꾸고 성장하는 건 살아있는 사람만이 갖는 특권이란 말을 에기에게 해준다. 불확실하지만 미래가 있단 것, 삶에 시간이 남았단 건 저주일 수도, 축복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생은 당장 내일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허망하게 유령이 된 도리스와 브랜든도 그랬다. 그들은 지박령으로 13년을 버텼고, 에기를 만나 한을 풀었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기회가 주어지진 않는다. <#0528>은 관객을 정신없이 웃기고 울리면서도 뚜렷한 메시지를 전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생은 단 한 번뿐이며, 그 한 번의 생에서도 단독 핀 조명을 받는 순간은 찰나일 뿐이라고. 그러니 반드시 자신만의 무대를 쟁취하는 ‘광대’가 되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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