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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지친다. 요즘 내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나를 절벽으로 몰고 가는 과로에도, 도 넘는 과로에는 무감각하면서 조금의 휴식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도, 그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정상성과 효율에 대한 강박에도, 모두 사회가 주입한 강박의 피해자면서도 그 사실을 모른 채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모습에도 지친 상태였다. 그러나 <레드북>을 보는 순간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혐오와 낙인, 강박에 짓눌리기는커녕 자유롭게 그것들을 놀리는 ‘안나’라는 여자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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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여성 서사


 

<레드북>은 여자가 글 쓰는 게 이상하다고 여겨지던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소설로써 자기 자신과 성(性)을 표현한 여성 ‘안나’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다. 최근 한 뮤지컬을 보고 예상한 것 이상으로 여성 캐릭터를 가학적으로 소비해서 놀란 적이 있었다. 관객 이전에 여성으로서 극이 진행되는 내내 소외감을 느꼈다.

 

<레드북>을 보는 동안 문득문득 그때의 관람 경험이 떠올랐다. 모든 순간이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레드북>에는 단 한 장면도 낭비하지 않고, 모든 부분이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과 그에 맞서는 이야기로만 채워졌다. 여성으로서 소외감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안나는 서른 살의 미혼 여성이다.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 조건이지만, 빅토리아 시대에는 정상적인 길에서 한참 벗어난 조건이다. 사람들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함부로 안나를 평가하고 조롱한다. 사회적 시선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당시 여자는 반드시 결혼할 수밖에 없었다. 미혼의 여성이 안정적으로 삶을 꾸릴 기반이 전혀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안나는 사회가 시키는 대로 내몰린 듯 결혼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 안나의 삶은 녹록지 않다. 미혼이라는 낙인과 함께 그런 안나를 우습게 보고 성적으로 희롱하는 시선이 가득하다. 처음부터 안나가 성희롱에 맞서다 억울하게 감옥에 끌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후반부 소설을 칭찬했던 유명 평론가도 실은 안나를 ‘야한 소설 쓰는 쉬운 여자’로 인식하고 성적 대상으로만 대한다. 사람들은 남자 작가가 쓰는 수위 높은 소설은 예술로 보고, 안나가 쓰는 건 외설로 취급하며 안나 자체를 문란하게 여긴다.

 

안나가 점잖은 소설을 썼다면 얘기가 달라졌을까? 그것도 아니다. 당찬 성격 탓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안나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자신 없어 하는데, 안나에게 내려진 할머니의 유산을 전해주기 위해 온 신사 브라운은 얼떨결에 구직 중이던 안나를 고용하게 되고, 감언이설로 그녀를 내보내기 위해 당신의 재능을 살리라고 조언을 던진다. 안나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브라운의 할머니를 즐겁게 해줬던 재능, 소설 창작을 해보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안나의 행보를 무시한다. 근거는 여자가 쓰는 글은 가치 없다는 것, 딱 하나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안나의 자유롭고 당찬 성격과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무시하는 세상에서 로렐라이 언덕은 낙원과도 같은 곳이다. 로렐라이 언덕은 여성의 글을 모아 기고하는 잡지로, 여성만을 회원으로 받으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독려하는 공간이다. 밖에서는 결함이었던 안나의 특성은 그곳에선 그녀만의 특별함으로 여겨진다.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공간에서 안나는 더 없이 빛난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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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는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고, 그런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한다는 이유만으로 사회 부적응자로 취급받는다. 안나를 희롱했던 평론가 ‘딕 존슨’은 자신의 희롱에 폭행으로 저항했던 안나에 대한 보복으로 사람들을 매수해 그녀의 소설이 풍기문란죄에 속한다는 인식을 퍼트린다. 브라운은 안나를 구해내기 위해 심신미약을 주장하라고 권유하지만, 안나는 자신의 소설을 재밌게 읽은 사람들에게 그 소설은 미친 사람이 쓴 거라고 할 수 없다며 이를 거절한다.

 

내가 만약 안나라면 평생 감옥에 갇힐 위기 앞에서 내 소설을 지킬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두렵고 확신이 없다. 안나도 아무렇지 않게 내린 결정은 아니다. 안나에게 소설은 평생 무시당하던 그녀가 그녀 자체로 인정받게끔 도와준, 안나 그 자체인 존재다. 그 존재를 부정하고 살아남은 삶이 의미가 있을까? 안나는 아니라고 판단해 두려움을 무릅쓰고 소설과 자신을 지킨 것이다. 안나의 이러한 의지는 <레드북>의 대표 넘버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의 가사에 잘 드러난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 없이 맑은 시대에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안나의 서사를 함께 겪은 뒤 들으니 훨씬 더 마음 깊이 와닿았다.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듣는 내내 ‘자기 이론(Autotheory)’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자기 이론이란, 자신의 삶에 대한 1인칭 서술에 비평 이론, 철학, 과학 연구 등을 결합한 문학적 전통을 말한다. 자기 이론이 에세이와 다른 점은 경험을 얘기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학문적 연구를 펼친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 여성이 자신을 드러내는 걸 금기시한 이 세상에서 자기 이론은 페미니즘과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안나는 페미니즘을 성취하기 위해 글을 쓴 적이 없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녀를 표현했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를 죄라고 했고, 안나는 납득할 수 없어 계속 글을 쓸 뿐이었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낙태 경험을 밝힌 책 <사건>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 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라는 말은 그녀와 마찬가지로 내 경험에 관해 글 쓰는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레드북>을 보면서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지워지고 사라지는 시대에 나를 말하는 안나에게도 같은 위로를 받았다. 나는 페미니즘을 위해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말하고 싶을 뿐이고, 이를 막는 세상의 논리에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나의 이야기는 결국 나의 이야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모든 여성의 이야기였다.

 

<레드북>은 여성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를 위로할 수 있는 좋은 극이다. 이 세상에 ‘정상’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보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지워지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 모든 사람에게 <레드북>이 말한다. 끝내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은 절대 이상하지 않다고. 계속 지켜내라고. 당신의 그런 행보가 누군가에게 반드시 힘이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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