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아름다움은 죽음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는가?
아니, 과연 삶은 아름답긴 한 것인가? 혹은 허무한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두 질문 사이를 오간다. 어떤 날은 모든 것이 의미 있어 보이고, 어떤 날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삶이란 결국 끝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끝을 실감하기 전까지는 지금 이 순간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매일의 반복 속에서 ‘살아 있음’의 감각은 흐려지고, 그 감각이 되살아나는 순간은 대개 어떤 상실을 겪었을 때다.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그 반대편을 마주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은, 살아 있는 동안은 찾을 수 없는 것일까.
환상이 깨지고 남은 <아메리칸 뷰티>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번햄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집안의 가장으로 무기력한 세월을 보낸다. 물질만능주의에 완벽주의인 아내와 사춘기 딸은 레스터를 홀대하고 무시하기에, 레스터는 집에서도 숨쉬지 못한다.
그러다 그는 딸의 친구 안젤라에게 성적인 욕망을 품고 이를 삶의 동력으로 여기며 갑작스럽게 인생에 활력을 얻게 된다. 마치 이미 지나간 시간에서 제대로 이루지 못한 욕구들을 충족하려는 듯, 직장을 관둔 다음 스포츠카를 구입하고, 안젤라를 염두에 두고 보디빌딩을 하는가 하면, 고급 마리화나를 피는 등 일탈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젤라를 성적인 대상으로 보았던 환상은 깨진다. 안젤라가 자신의 딸과 다르지 않은 10대 소녀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은 직후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순간 레스터는 죽임을 당하며, 죽어가는 동안 삶의 아름다움이 가족과 함께하던 사소한 순간순간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덧없음과 아름다움의 충돌 <하나비>

<하나비>의 니시와 호리베는 야쿠자 소탕 전문 형사 콤비지만, 습격으로 인해 호리베는 불구가 되고, 니시는 후배의 죽음을 계기로 경찰직을 그만둔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후 삶의 의지를 잃었던 호리베는 그림을 그리면서 희망을 되찾게 되지만, 이를 도와줬던 니시는 정작 백혈병에 걸린 시한부 아내의 치료비를 사채업자로부터 빌렸고 결국 경찰 유니폼을 입은 채 은행을 턴다. 그리고는 아내와 함께 여행을 떠난다. 니시 부부는 조용하고 소박한 여행을 즐기다 바닷가 앞에서 함께 자살한다.
파편이기에 찬란한 삶
삶의 대안으로 선택되는 죽음은 허무하다. <하나비>는 자살시도를 한 이후 그림을 통해 삶에 대한 희망을 갖는 인물인 호리베와, 삶의 남은 순간들을 채워가다 자살을 택한 니시의 대비를 통해 전개된다. 이로 인해 내러티브의 구조는 삶과 죽음을 마치 대립항으로 그리는 이분법에 가까워지고, 죽음을 향한 니시의 선택은 삶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얻은 정적이 된다. 결국 이 영화는 삶과 죽음을 병치해놓았지만, 죽음으로 삶-영화를 완전히 종결지어버렸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에 가까운 서사로 읽힌다. 제목인 ‘하나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화려하게 터지자마자 사라지는 불꽃처럼 소멸 자체에서 의미를 찾고, 무상한 삶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서 죽음을 택한 것이다. 그 전까지의 유예 시간을 여행을 통해 아무리 채웠더라도, ‘더 살 이유가 없기에’ 죽었다는 것이기 때문. 누군가는 이렇게 죽음을 담담하게 내재화하는 모습을 죽음에 대한 일종의 초월이라고 평가한다지만, 오히려 삶의 대안으로 죽음을 선택한 것은 죽음이라는 유일한 선택지에 종속된 것일지도 모른다. 허무한 삶에 극렬히 반항하지 않고 죽음이라는 선택지로 도피한 것은 아닐까.
반면, <하나비>의 니시가 삶에 죽음의 의미를 부여한 것과 달리, <아메리칸 뷰티> 속 레스터는 죽음에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영화 내내 안젤라를 향한 욕망에서 삶의 동기를 찾으려 하는 레스터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역겹거나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계속해서 삶을 전환하려는 의지로 해석된다. 죽기 전에야 삶 속 순간들에 존재했던 아름다움을 찾아 내는 엔딩도 그러하다. 죽음을 마주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아름다웠다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비>의 니시는 죽음이라는 미래를 결정해 두고 그때까지의 시간들을 채웠다면,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는 죽음을 마주한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삶의 아름다움을 추억한다.
레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는 말이 지금은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을 겁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언젠가는 알게 될 테니까.’ 과연 삶의 아름다움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아메리칸 뷰티>에서 비닐이 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던 리키와, 연을 날리는 시퀀스로 마무리하는 <하나비>.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것이, 바람에 몸을 맡기는 것이 곧 삶이라면, 그리고 결국 결말이 예정되어 있다면, 삶은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 어째서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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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게 만든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것도 '지금' 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선택을 유예할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죽음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 당장 어떤 순간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하게 만든다. 모든 선택은 다른 가능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죽음이라는 시간적 한계가 전제된 순간, 매 순간은 유일한 선택이 되고, 이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결국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삶은 죽음에 의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비춰지는 것이다. 둘은 대립항이 아니며, 서로의 거울이기에, 죽음의 무게는 결국 삶의 무게와 같다. 죽음은 삶을 무효화하지 않으므로 삶은 더이상 허무한 것이 아니게 된다. 그러므로 삶의 아름다움은 죽음을 통해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인식한 뒤에도 계속 살아가려는 그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
삶은 깨어지기에 완성된다. 그러니까, 조각나야 간신히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찰나의 파편일지라도 가장 빛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