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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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명의 서로 다른 사람이 모인 곳에는 반드시 백 가지의 서로 다른 상실이 있다. 여기서 백 가지란 하한선이다. 한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상실의 가짓수는 셀 수 없으니까.

 

어떤 상실은 태어남과 동시에 손에 쥐어진다. 상실이 ‘쥐어진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진실로 그렇다.

 

태어남과 동시에 그 타고난 환경이, 가족이, 신체 조건이, 기질이, 또는 그 사람 자체가, 그로 하여금 어떠한 삶의 모습은 영영 이룰 수 없을 것처럼 요원해지도록 만든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는 그 사실을 모르되,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실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내게 주어졌던 상실이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가장 간절히 무언가를 열망하게 될 때, 가장 아픈 방식으로.

 

내가 나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더 나은 집안에서 태어났더라면. 나를 조금 더 아끼고 사랑하는 부모님을 만났더라면. 내 타고난 재능이, 성정이, 외형이 이렇지 않았더라면. 그럼 나는 지금과는 달랐을 텐데.

 

어디 태어남만이 그러할까. 삶을 살아가는 일은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과도 같아, 하나의 상실을 지나오면 반드시 다음 상실로 발을 내딛어야 한다. 어떤 꿈은 영원히 이루지 못한다. 어떤 시절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떠나보낸 기회는 두 번 다시는 나를 찾지 않는다. 속절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 사랑하는 이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곁을 떠나가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무용한 줄을 알면서도 무수한 ‘만약’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것이다.

 

내가 그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그때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더라면. 주위 환경이 나를 조금만 더 도와주었더라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도 내 곁에 있었더라면. 세상이 내게 조금만 더 친절했더라면. 그럼 나는 지금과는 달랐을 텐데.

 

수많은 ‘만약’에 짓눌려 밤잠을 설칠 때면 으레 ‘지금과는 달랐을’ 나를 상상해 보곤 했다. 상실을 겪지 않았을 또 다른 나. 그때 잘못된 선택을 내리지 않았을 나. 그때 꿈을 포기하지 않았을 나. 그때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지 않았을 나. 원하는 것은 모두 얻고, 이루고픈 것은 모두 이루어낸 나. 이 무수한 ‘또 다른 나’들이 실재한다면 어떨까. 그 애들과 내가 한자리에 모인다면 그 애들은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내게 무슨 말을 할까.


수많은 ‘나’들이 한자리에 모인 순간.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바로 그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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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이름은 에블린이다.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번잡스러운 세탁소의 사장. 신경질적인 아내이자 무심한 어머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수한 날들 중 하루, 지지부진한 세무조사를 받던 에블린에게 갑작스레 남편 웨이몬드가 알 수 없는 말을 건넨다. 자신은 다른 우주에서 온 또 다른 웨이몬드라고. 부디 자신의 우주를 구해 달라고.


삶의 가능성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순간 에블린이 속해 있는 우주 역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에블린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순간, 나머지 하나를 고르는 또 다른 에블린은 별개의 우주가 되어 떨어져 나간다. 이렇게 분리된 수많은 ‘또 다른 에블린’들은 각자 서로 다른 우주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고, 원래대로라면 다른 우주와 영원히 접점 없이 살아갔을 에블린은 다른 우주에서 예고 없이 난입한 웨이몬드의 손에 이끌려 처음으로 또 다른 우주들의 또 다른 자신들을 목격하게 된다. 삶의 모든 기로에서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선택을 내린 에블린들을.

 

야속하게도, 지금 이 우주의 에블린이 가지 않았던 길을 간 수많은 다른 우주의 에블린들은 이 우주의 에블린보다 훨씬 빛나 보인다. 유명세를 떨치는 영화배우가 되어 찬사를 한몸에 받는 에블린. 음악적 재능을 꽃피운 무대 위의 가수 에블린. 수많은 우주들 중 가장 앞서 있다는 ‘알파버스’의 뛰어난 과학자 에블린. 알파버스의 에블린은 그 능력을 가감없이 발휘하여 기어이 다른 우주와 통하는 법을 찾아내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지금 바로 여기 이 우주의 에블린에게까지 도움의 손길을 뻗는다. 모든 우주를 구할 수 있는 에블린은 오직 너뿐이라면서.

 

우스운 말이다. 가장 빛나는 우주를, 가장 비루한 우주가 무슨 수로 구원한다는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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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기로에서 우주가 갈라진다는 이 영화의 전제는 단순히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니다. 이 영화는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을 문학적으로 재해석하여 펼쳐 놓은 것이다.

 

상자 안에 갇힌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상자를 열어 관찰하는 순간 죽은 상태와 산 상태 중 하나로 오그라들어 수렴한다. 이것이 양자역학의 주류 해석인 ‘코펜하겐 해석’이다.

 

그러나 휴 에버렛 3세의 ‘다세계 해석’ 아래에서, 죽은 고양이와 산 고양이는 각각 서로 다른 우주로 갈라져 현실화된다.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들은 하나의 가능성으로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세계로 나뉘는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우주는 갈라진다. 수많은 상실을 안고 있는 이들에게 이 해석은 미묘한 잔향을 남긴다 - 다른 우주 어딘가에는 내가 상상으로만 그려 보았던 또 다른 내가 살아 숨쉬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 잔향은 머릿속에 공허한 독백을 새겼다. 나는 죽은 고양이가 아닐까. 다른 우주의 살아남은 고양이가 삶을 영위하는 모습을 머릿속으로만 막연히 그려 보고 부러워하는, 불운한 우주의 죽은 고양이인 게 아닐까.


삶의 도처에 지뢰처럼 널린 불운을 밟아 상실을 겪을 때마다, 그래서 수많은 ‘만약’에 짓눌려 밤잠을 설치게 될 때마다, ‘다세계 해석’을 부표 삼아 거기에 매달리곤 했다. 수많은 우주의 또 다른 나 자신들을 떠올리면서. 그 애들이 내가 가지 못한 길을 대신 가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루고, 내가 마음속으로만 그려 보았던 모든 것을 현실에서 대신 누리고 있을 테니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그 무수한 우주들 중에서 바로 지금 여기, 이 우주의 나는 단연코 첫 번째가 아니었다. 수많은 우주를 일렬로 줄세웠을 때 아무리 잘 쳐 봐야 중간,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뒤쪽. 수많은 상실과 그에 따르는 ‘만약’으로 점철된 삶은 불운했으나, 그 불운은 딱히 극적이지도 않고 모두의 동정을 살 만큼 명료하지도 않아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것이 될 뿐이었다. 그리하여 비극에서도 주인공조차 못 될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이 우주의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는 실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우주의 에블린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조잡하고 정신없는 먼지 쌓인 세탁소를 운영하며, 완벽한 모국어도 완벽한 영어도 아니게 되어 버린 언어를 쓰는, 딸에게서는 원망의 눈초리를 받고 남편에게서는 남몰래 쓴 이혼 청구서를 받게 생긴, 애매하기 짝이 없는 비루한 우주의 에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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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우주를 파괴하고자 하는 장본인이자 에블린의 딸인 ‘조부 투파키’는 에블린을 향해 말한다. 모든 것은 부질없다고.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삶에서 그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고통도 별것 아니게 된다고. 이 무(無)에 근거한 체념은 애매하게 비루한 우주에 사는 모든 이를 중력처럼 대차게 끌어당긴다. 무엇도 이루지 못할 것만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는, 무엇도 이루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 되뇌이는 것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는 탓이다.

 

거듭되는 상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게 만든다. 애당초 원하지 않으면 상실은 생기지 않으니까. 애당초 사랑하지 않으면 슬픔은 생기지 않으니까.

 

조부 투파키가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적막한 세계에서 그저 돌 하나로 남기를 바란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지독한 무(無)에 빠져 본 사람이 그려낼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그 무(無)가 삶을 덮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그려낼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에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상실이 싫어 도망친 이들을 건져낼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사랑이며, 이 영화의 끝은 그 사랑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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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이 우주의 에블린은 자신과 웨이몬드가 서로의 손을 놓고 떠남으로써 종국에는 영화배우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우주를 동경한다. 에블린은 생각한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자신은 웨이몬드의 손을 놓겠노라고.

 

그러나 그토록 찬란해 보이는 우주의 찬란한 웨이몬드는 찬란한 에블린에게 말한다.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면 자신은 에블린의 손을 잡겠노라고. 에블린의 손을 잡고 평범한 삶을 함께 꾸려 나가는 또 다른 우주에서의 자신을 몇 번이고 상상했노라고.

 

나의 우주가 원하는 것을 저 찬란한 우주는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저 찬란한 우주가 원하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 우주의 사랑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귀띔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언제나 저 빛나는 우주들을 부러워하기만 했으나, 저 빛나는 우주들도 어쩌면 나의 우주를 부러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의 우주는 동경을 하기만 하는 우주가 아니라, 동경을 받는 우주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손에 쥐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애매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바로 여기 지금 이 우주에서 그나마 봐줄 만한 한 조각 때문에.


그러니 우리는 지금 여기 이 우주를 사랑해야 한다. 이 우주에서 그나마 봐줄 만한 조각을 구석구석 뜯어보고 찾아내어 아껴 주어야 한다. 내가 열망하는 것을 모두 가진 다른 우주의 나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이 한 조각을 열망하며 마음 끓이고 있을지 모르니까. 모든 것을 가진 다른 우주의 내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으니, 나도 어쩌면 조금은 행복해도 될지 모르니까. 내가 쥐고 있는 애매하고 비루한 이 한 조각은 다른 그 어떤 우주에도 없는 유일한 가능성이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다른 그 어떤 우주도 아닌, 비극의 주인공조차 되지 못할 뻔한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이 우주의 에블린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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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서 발휘하는 사랑은 그렇게 비로소 모든 것을 구원한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우주의 순간을 사랑하며 바로 지금 여기 이 우주의 모든 이에게 다정을 실천하는 웨이몬드의 방식을 배움으로써, 에블린은 끝내 기나긴 싸움을 종결시킨다. 바로 지금 여기 눈앞에 있는 딸을 향해 서투른 사랑을 가감없이 내보임으로써, 에블린은 무(無)로 걸어들어가 사라지려던 조부 투파키를 멈춰세운다. 같은 순간 엄마를 떠나 차에 몸을 실으려던 이 우주의 딸 ‘조이’도 함께. 같은 순간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지려던 다른 우주의 ‘돌멩이 조이’도 함께. 다른 우주의, 또 다른 우주의, 그 다음 또 다른 우주의 수많은 조이들도 함께.

 

그렇게 모든 우주는 살아남는다. 비루한 우주의 서투른 사랑 덕분에.


사랑에는 분명 상실이 따른다. 그러나 상실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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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우주를 비롯한 모든 우주를 구해낸 이후에도 에블린의 삶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에블린은 여전히 먼지 쌓인 번잡한 세탁소를 운영할 것이고, 때가 되면 지지부진한 세무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고, 영어도 모국어도 아닌 어중간한 언어를 쓰며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꾸려 나갈 것이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에블린은 자신의 우주를 사랑할 것이다. 자신의 우주에서 봐줄 만한 조각을 구석구석 뜯어보고 찾아내어 아껴 줄 것이다. 조금 더 친절하고, 조금 더 다정해질 것이다. 그 서투른 사랑이 있는 한, 모든 것은 그대로이나 모든 것은 더는 이전 같지 않을 것이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던 세무 조사관은 가정의 위기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가 되어 줄 것이다. 늘 엇나가는 듯 반항적이던 딸 조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켜 주는 소중한 가족이 될 것이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했던 남편 웨이몬드와의 일상은 다른 찬란한 우주의 찬란한 에블린조차 꿈에 그리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영화는 말한다. 바로 지금 여기 이 우주를 사랑하자고. 바로 지금 여기 이 우주에서 사랑을 실천하자고.

 

사랑한다 해서 이전에 있던 상실이 없어지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사랑한다 해서 앞으로 다가올 상실이 없어지느냐 하면, 그것 역시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가 일곱 번의 상실로 일곱 번 넘어질 때면, 마지막에 반드시 여덟 번째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불운과 슬픔으로 얼룩져 있다고 생각하게 될 때면, 그 얼룩에 물들지 않은 제법 봐줄 만한 마지막 한 조각만큼은 반드시 남겨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비로소 애매하고 비루했던 이 우주는 더 이상 비루하지 않게 된다.

 

그것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우리에게 건네는, 하나인 동시에 수만 가지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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