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객의 시선에서 실천가의 시선으로
약 한 달 전, “예술가의 공간이 궁금하다면 오픈 스튜디오를 방문해 보자”라는 기고문을 통해 런던 기반 레지던시 Gasworks의 오픈 스튜디오 방문기를 전한 바 있다. 2개월 간의 연구와 각자의 개성이 담긴 5개의 스튜디오는 일종의 전시장이자 예술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제3의 공간으로서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방문 이후에도 Gasworks에 대한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이 레지던시는 국제적 진출 기회를 얻기 어려운 비서구권 국가 출신의 작가들을 한데 모은다. 입주 기간 동안 작업 과정과 결과물의 구성은 모두 작가의 자율에 맡긴다. Gasworks가 세계 각지의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들이 제공하는 런던에서의 2달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러한 질문으로 시작된 Gasworks와의 이메일 교환은 지난 10월 1일 전시 “Marie-Claire Messouma Manlanbien: Mémoires des corps”의 오프닝 프리뷰 현장 방문으로 이어졌다. 메일 소통을 도와주었던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프레드(Fred)를 통해 Gasworks의 큐레이터 로사(Rosa)와 짧은 인터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인터뷰를 통해 런던의 아트씬과 국제 예술계를 매개하는 운영자의 시선에서 Gasworks를 들여다보자.
Marie-Claire Messouma Manlanbien의 작업. 직물과 조형으로 '여성성'과 '우주'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른 세대와 문화권에서 다루어지는 방식을 보여준다. 태피스트리 작업 주변 곳곳에 매달린 조약돌들은 은하수를 연상케 한다. 작가가 다루는 여성성-생명-우주의 연결성을 시각적으로 잇는 장치가 된다.
사진: 직접 촬영
Gasworks 입구의 전광판. 밤에 방문하니 더욱 운치있었다.
사진: 직접 촬영
안녕하세요, 큐레이터님의 언어로 Gasworks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Hello, please tell me a bit about Gasworks in your own words.
Rosa: 저만의 언어요? 음… 이곳은 ‘예술적 개발(Artistic development)’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그동안 수많은 국가들에서 온 약 700명의 작가가 저희 레지던시를 다녀갔어요. 서로 다른 탐구를 이어온 작가들은 이곳에서 함께 시너지를 내고 국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죠. 실제로 Gasworks를 다녀간 이후에 자신의 커리어를 더욱 발전시킨 수많은 작가들이 있습니다. 개인의 차원에서든 씬의 차원에서든 어떠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지난번에 오픈 스튜디오 데이에 방문했을 때 느낀 것인데, 작가분들이 정말 다양한 주제로 작업을 하셨더라고요. 다양한 국가의 작가들을 초대하고 있지만 ‘다양성’이라는 테마에 국한된 것은 아닌 것 같았어요. 맞나요?
When I visited during the Open Studio Day, I found that the programme was not limited to the theme of “diversity” itself. Even though you invite artists from many different countries. Is that right?
Rosa: 맞아요. 저희는 작가들에게 특정 주제를 요구하지 않아요. 그들이 하고 싶은 것들을 하게끔 두죠. 주제에 관련된 어떤 취지가 있지는 않거든요.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작가들을 선별하시나요?
Then, are there any other key aspects you look for when selecting artists?
Rosa: 우선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국제적인 활동 경험, 특히 영국에서의 경험이 없는 작가들이에요. 그것이 전시 경험일 수도 있지만, 아시잖아요. 여기서 미술로 학업을 이어왔다든지 말이에요. 비슷한 잠재력이 보인다면 이런 분들을 더 선호합니다. 그 외에는 자기만의 확고한 연구가 있다는 것이겠죠. 지금까지 해온 개념 작업이라던가, 재료 실험이라던가. 이런 부분에서 자기 개성이 있는 작가들을 눈여겨봤던 것 같아요.
아, 자기 출신의 도시에서 무엇이든 적극적인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도 좋은 선별 기준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의 마닐라 출신 작가라면 마닐라의 것, 그곳의 아트씬, 도시 문화 등에서 얻은 경험과 인사이트를 런던에서도 잘 활용할 수 있는 작가들이 이곳을 다녀갔던 것 같아요.
프로그램은 자기 주도적으로 진행된다고 하셨습니다. 작가들이 이곳에서 그들의 시간을 어떻게 계획하는지 궁금합니다.
You mentioned the programme is self-led. I’m curious how artists typically structure their time here.
Rosa: 완전히 달라요.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작업을 하는 작가도 있고, 아이디어가 샘솟을 때 오랜 시간 스튜디오에 머무는 작가도 있어요. 사실 우리는 입주 작가들이 이곳에서 엄청나게 대단하고 방대한 결과물들을 선보이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작가들 성향에 따라서 2개월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거든요. 다만 입주 기간 동안 런던을 의미 있게 탐험하면서 영감을 얻어가기를 바랍니다.
레지던시의 운영 목적은 더 다양한 지역의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인데요, 동시에 런던 미술계에도 다양성을 불러오는 데에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전에 제공해 주신 정보에 따르면 입주 작가들은 런던 기반 작가들을 위한 다른 여러 스튜디오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네트워킹을 위한 행사를 주관하고 계신가요?
The residency is designed to give opportunities to artists from diverse regions. But I think it also brings greater diversity into the London art scene. Actually, according to the provided information previously, the participants can also engage in the wider community of London-based artists from other studios. Do you host any networking sessions or events among them?
Rosa: 공식적인 정기 행사는 없습니다. 다만 커뮤니티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런던 기반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른 레지던시 입주 작가들과 동등한 혜택이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저희는 작가들에게 입주 기간 동안 박물관과 미술관에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는 카드를 제공하고 있어요. 멋진 혜택이죠. 그들이 많은 영감을 얻기를 바라요.
Fred: 지난번에 주방에서 비슷한 이벤트가 있지 않았나요?
Rosa: 아 그래요, 관계자끼리만 열었던 작은 파티였지만 주방에서 다른 국제 레지던시들, 델피나(Delfina foundation)와 볼테어(Studio Voltaire)의 입주 작가들과 다 같이 파티를 한 적은 있어요. 큐레이터들도 함께 참여해서 나름의 네트워킹이 되었습니다.
Gasworks는 레지던시뿐만 아니라, 오늘처럼 전시도 함께 운영하고 있죠. 혹시 두 프로그램 사이에 특정 연결점이나 운영 방침이 있나요? 아니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것인가요?
Gasworks runs both the residency and the exhibition programme. Is there a conceptual link between them, or do they operate more independently?
Rosa: 레지던시 출신의 작가들을 전시 공간에서 다시 선보이거나, 반대로 전시를 했던 작가들이 다시 레지던시의 입주 작가로 참여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습니다. 다만 원칙적으로 두 프로그램은 서로 다른 독립된 운영 체계를 가지고 있어요. 공통된 방침이나 연계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답변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미술계가 세계화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Gasworks같은 국제 레지던시의 방향성은 어떻게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Thank you for sharing your insights so far. This is the last question. The art world is becoming increasingly globalised. How do you see the role of a global residency like Gasworks evolving?
Rosa: 레지던시 이후의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공고히 하는 것에 이바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제가 필리핀을 예시로 들었었는데, 약 10년 전에 참여했는데도 계속 연락을 이어오고 있어요.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종종 필리핀 출신의 작가들을 계속 초대하고 있다보니, Gasworks라는 연결고리로 필리핀에서도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더라고요. 지난 31년간 700명 이상의 작가가 저희와 함께했습니다. 이들이 Gasworks에서의 시간 이후에도 여러 장소에서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그것의 연결점이 되어준다는 게 저희의 역할인 것 같아요.
Gasworks와 Triangle Network
Gasworks는 국제 예술 네트워크인 Triangle Network의 런던 파트너로서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Triangle Network는 수집과 앤서니 카로(Anthony Caro)와 자선가 로버트 로더(Robert Loder)가 1982년 뉴욕 북부에서 워크숍을 열며 시작되었다. 이들의 워크숍은 예술가들이 시장, 학계, 기관이 구축한 시스템에 구애받지 않고 과정을 중심으로 그들의 작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들은 미국에서 성공적인 몇 번의 정기 행사를 이룬 후 남아프리카의 요하네스버그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와 남아시아 등지에 워크숍을 열며 네트워크와 협력 규모를 확장했다. 그리고 1990년, 그들의 가치를 기반으로 장기적인 교류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꼈고, 요하네스버그에 첫 파트너 기관 Big Factory를 설립하여 해외 작가들을 초청하는 국제 레지던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Gasworks는 이러한 Big Factory의 모델을 런던에서 실현하고 있다. Triangle Networks의 중심 허브 역할을 하며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을 모아 국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이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자극받을 수 있는 연구 기반을 제공한다. 입주 기간 동안 스튜디오 활용과 결과물의 규모를 전적으로 작가의 재량에 맡기는 Gasworks의 방향성은 결과보다 ‘과정’을 통해 예술가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했던 Triangle Network의 가치를 반영한다.
인터뷰의 큐레이터 로사가 강조한 ‘레지던시 이후의 시간’은 네트워크 형성 이후의 지평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레지던시 이후 작가들은 자신의 나라, 혹은 다른 국가의 아트씬에서 활동을 이어간다. 그들이 런던에서 형성한 네트워크는 광범위한 확장을 이룬다. Gasworks라는 연결점으로, 레지던시를 방문했던 작가들은 자신들의 도시와 장소에서 주도권과 자생력을 마련한다. 작가들에게 제공되는 런던에서의 2개월은 이력서에 추가되는 경력 1줄이 아닌, 초국가적 네트워크 형성이 기반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연결점 형성’을 위한 노력은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광주비엔날레는 광주라는 지역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아시아 미술의 민주화 담론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국제적 의의를 인정받은 바 있다. 비교적 최근에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설립으로 동아시아 미술계를 주도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샤르자 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했던 아말 칼라프(Amal Khalf)가 2026 부산 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로 참여하며 현재 아트 바젤 카타르 등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동 미술계와의 네트워크 강화도 기대된다.
국제 레지던시를 비롯한 국제 미술 프로그램은 특정 국가를 경험하는 통로만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각기 다른 지역의 문화적 자원을 축적한 작가들의 교류는 새로운 연결과 예술적 발전으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Gasworks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국제적 기관의 설립, 해외전문가들의 협업, 국내 예술가들의 해외 진출, 이러한 소식들이 지닌 가시적인 성과를 넘어, 이 '연결'이 지니는 향후 영향력을 지켜보는 시선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