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냄새가 은은히 퍼지는 순간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빵을 좋아한다. 빵이 가지고 있는 기초적인 질감이나 향이 좋다. 그중 섬세함이 느껴지는 페스츄리류를 가장 좋아한다. 이처럼 빵을 바라보면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을 상상하는 순간도 좋지만 맛보다 기억으로 좋아하는 빵이 있다.
유럽에서 지내는 동안 종종 카푸치노 한 잔과 시나몬롤을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기보다 묵직하고 포근한 맛이 느껴지는 평범한 빵이다. 한국에서는 시나몬롤을 흔하게 볼 수 없어서 마주칠 때마다 시나몬롤 한 조각이 떠올리게 하는 온기에 이끌린다.
모든 음식에는 인간이 먹고 마시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이름을 얻고, 각각의 이름은 사회적으로 정해진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 위로 공유되지 않은 개인의 의미가 덧붙여지기도 한다. 시나몬롤은 나에게 설탕과 계피를 발라 구운 빵 이상의 한 줌의 온기로 남아있다.
어떤 음식에는 개인의 의미를 넘어서 공동체의 의미가 있다. 먹는 행위가 단순히 음식 따위를 배 속에 들여보내는 일이 아닌 것처럼 포르투갈어 pão에서 건너온 빵이라는 이국적 단어는 더 거슬러 올라가 ‘먹이다, 양육하다’라는 뿌리를 가졌고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또 다른 의미를 골똘히 생각하면 공동체적 의미에서 생명이 담긴 고귀한 물질으로서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다.
겨울의 기다림
슈톨렌(Stollen)은 독일에서 크리스마스에 먹는 대표적인 전통 빵이다. 럼, 말린 과일, 견과, 향신료 등을 넣고 구운 뒤, 설탕과 슈가 파우더를 발라 오래 먹을 수 있도록 한다. 14세기 독일 작센 지방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크리스마스 한 달 전에 미리 만들어 대림절 기간동안 조금씩 썰어 먹는 문화가 있다.
파네토네(Panettone)는 이탈리아에서 크리스마스와 연말 시즌에 먹는 전통 빵이다. 둥근 돔 형태로, 건포도, 오렌지필, 껍질과일 등을 넣고 2~3일 정도 장기간 숙성한다. 달고 묵직한 슈톨렌과 달리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며 크림이나 치즈, 혹은 단맛이 나는 음료를 곁들여 먹는다.
봄의 부활
핫크로스번(Hot Cross Bun)은 주로 영국에서 성금요일(Good Friday, 부활절 전의 금요일)에 먹는 빵이다. 건포도와 향신료를 넣고 둥글게 빚어 발효시킨 후, 십자 무늬를 새겨 굽는다. 성금요일을 기념하기 위해 십자가 문양의 빵을 나눠 먹는 기독교적 전통에서 시작됐다. 향신료의 향과 버터의 풍미가 어우러져 따뜻한 맛이 난다.
쿨루라키아(Koulourakia)는 그리스에서 부활절 전후에 구워 먹는 쿠키다. 나선형, 매듭 모양 등 다양한 형태로 꼬거나 비틀어 만든다. 부활절 전날(Holy Saturday) 만들어 부활절에 커피나 차와 함께 먹는다.
가을의 생명
멕시코에는 일 년에 한 번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이승을 찾아온 죽은 자들을 환영하는 ‘죽은 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이 있다. 매년 10월 말에서 11월 2일 사이 가족들은 죽은 자의 빵(Pan de Muerto)을 만들어 나눠 먹거나 제단에 올린다. 생명의 순환을 상징하는 둥근 형태에 죽음과 기억을 상징하는 뼈 모양 반죽이 올라간다. 설탕을 입혀 달콤하고 할라나 브리오슈와 같은 부드러운 식감이다.
9월에서 10월 사이 유대교 새해 명절인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을 기념하기 위해 유대인들은 둥근 할라 빵(Challah)을 굽는다. 사과와 빵을 꿀에 찍어 먹으며 달콤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보통 할라 빵은 길게 땋은 모양이지만 로쉬 하샤나에는 특별히 한 해의 순환을 나타내는 둥근 모양의 할라 빵을 먹는다.
개인이 속한 문화권에 따라 지나가는 시간과 계절에 떠올리는 음식이 다르다. 같은 온도에도 저 멀리서는 다른 음식을 떠올린다는 점이 흥미롭다. 시간이 흐르며 서양권 음식 문화인 빵이 한국으로 건너왔고, 다양한 유럽빵을 한국에서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다. 내가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경험해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빵 한 조각을 베어 물고 느껴지는 저 먼 곳의 시간과 계절을 음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