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소극장 무대 위 스탠드 마이크와 핀 조명 하나.
곧이어 명랑한 패턴이 그려진 주황빛 원피스를 입은 배우가 등장한다.
특유의 촘촘히 땋은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고, 발목 위로 올라오는 신발을 야무지게 묶어 신은 모습.
그런 그녀에게선 왠지 모를 당찬 아우라가 풍긴다.
객석 조명까지 완전히 꺼지자, 그녀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곤 차분하고도 신비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리타의 초상화(Portrait de Rita)는 로렌 막스(Laurène Marx)가 극본 및 연출을 맡은 1인극으로, 인종차별과 백인성, 사회 시스템 안에서의 폭력, 정체성, 모성애를 다루는 작품이다. 실제 인물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쓰여진 각본은 리타의 아들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리타의 아들 마티스는 학교에서 인종차별적인 발언을 듣고, 소동을 벌여 경찰에 의해 바닥에 짓눌린 상태로 어머니 리타를 마주한다.
"아홉 살짜리 애가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를 수 있겠어요. 아홉 살짜리는 경찰에게 짓눌릴 만큼의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 없어요. 그러나 그 아홉 살짜리는 흑인이지요."
노란빛에서 주황빛으로, 주황빛에서 분홍빛으로 리타의 감정선에 따라 섬세하게 조명이 바뀐다. 그러다 한 챕터를 마무리하듯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배우는 간단하지만 명확한 동작으로 상처가 켜켜이 쌓여 단단해진 내면을 몸짓으로 드러낸다.
리타는 젊은 시절 한 백인 남자를 만나 프랑스로 이주한 기억을 회상한다. 고향 카메룬에서 성공한 여성 사업가로서 이룬 것들을 전부 버리고, 그 남자를 따라 국경을 넘어 가사도우미로 일하기 시작한 그녀. 순식간에 일어난 계급 하락과 함께 투명인간 취급과 노동 착취를 당하는 데에 익숙해진다.
그녀를 다면적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급 계층의 노동자, 혹은 이국적인 존재로 대상화해버리는 사회적 억압은 아들 마티스의 사건과 평행선을 이룬다. 마티스가 당한 인종차별적 발언과 그에 따른 "아홉 살짜리 아이"의 상처는 안중에도 없이,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린 아이를 통제 불능한 위험 대상으로 분류하고 강하게 진압한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이 극은 자신을 '트랜스 백인'이라고 칭하는 작가 로렌 막스의 시선과, 혼자서 온전히 극을 이끌어가는 배우 브왕가 필리밀리의 몸짓,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어머니 리타의 목소리가 복합적으로 섞여 처절한 외침이 된다. 이 세 여성이 극 속에서 교차되는 지점은 극의 가장 큰 특징이자, 메시지를 보다 강렬하게 전달하는 핵심 요소다. "Rita elle dit,(리타는 이렇게 말했다,)"로 시작하는 극중 인물 리타의 대사에 배우 자신의 이야기를 얹는다.
콩고 출신으로 벨기에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배우 브왕가 필리밀리는 유럽으로 이주한 흑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리타와 아주 닮아있다. 예술계, 특히 유럽 예술계에서 흑인 여성이 갖는 배역 선택의 한계나 자신을 대상화하는 백인 주류 사회의 시선을 담담히 풀어낸다.
극에서 잠시 나와 본인 또한 이러한 억압과 폭력의 피해자임을 밝히는 순간, 이 극은 실화 기반의 드라마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적 논평으로 확장된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페이드인 되며 흘러나오는 신나는 재즈 음악과 그에 맞춰 마음껏 춤추는 그녀는 리타이자, 브왕가 필리밀리이자, 로렌 막스다. 비로소 그녀는 한 시간 반 동안 지키고 서 있던 스탠드 마이크 앞을 벗어나, 무대를 휘저으며 자유로이 움직인다. 커튼콜에 접어드는 순간에도 그녀는 여전히 리타이자, 브왕가 필리밀리이자, 로렌 막스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배역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에 이르니, 그녀가 온몸으로 이 극과 하나되었음을 느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한다.
프랑스에서 아시아인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수없이 겪은 인종차별과 대상화,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시스템이 가한 폭력이 스친다.
그녀는 리타이자, 브왕가 필리밀리이자, 로렌 막스, 그리고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