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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성공과 예술은 동의어인 것일까? 우리는 왜 예술에 빠지면, 성공 하기를 갈망하는 걸까? 자유가 곧 자본인 세상이니까? 그런 세상을 욕하면서도 우리는 자유를 얻기 위해 끝없는 예술의 갈망을 위해 기꺼이 우리는 스스로를 내던진다. 예술의 시작이 자기 자신인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결국 시작했던 처음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면서까지 성공을 쟁취하고자 한다.


여기 예술과 자유를 갈망하던 브론테 세 자매의 이야기가 있다.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를 남긴. 제목만 들어도 명작임을 알 수 있는 이 작품 모두 ‘브론테’라는 같은 성을 가진 영국의 시골 요크셔에서 태어난 세 자매의 작품들이다.


이미 수많은 버전으로 이들의 이야기가 다뤄졌으나, 이번 연극은 조금 다르다. 더줌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된 <언더독: The Other Other Brontë>는 ‘제인 에어’로 유명한 첫째 샬롯 브론테가 아닌 막내 '앤 브론테'에게 초점을 맞춘다. 이들이 어떻게 유명해졌는지, 또 이 세 자매 사이에서는 어떤 사랑과 질투, 경쟁이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국 극작가 사라 고든의 작품으로, 이번 한국에서 처음으로 무대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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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인상적이었다. 서사 자체도 짜임새 있었고, 연출도 훌륭했고, 연기는 말해 뭐 해였다. 솔직히 한남동 오거리에서 버스만 갈아타보았지 '더줌아트센터'라는 훌륭한 공연장이 있는 것도 처음 알았고 너무나 좋은 공연을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한 것이 미안할 정도였다.


무릇 우리는 자유를 늘 갈망한다. 쳇바퀴 같은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이 곧 자유인 세상에서 우리는 만족할 때까지 계속 일을 하고 또 한다. 예술 애호가들 또한 그런 마음으로 예술을 감상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진 느낌. 내 영혼이 살아있는 느낌. 이를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술을 향유한다.


그렇다면 창작하는 이들은 어떨까? 살아있는 느낌이 이들에게는 절대적이다. 브론테 자매에게도 그랬다. 19세기 순종적인 여성상이 당연하던 영국에서 왜 이들은 부득부득 남자 필명을 쓰면서까지 글을 쓰고자 했고, 이름을 알리고자 했고 자유를 얻으려 했을까? 이들은 왜 그 당시 숱한 여성들과는 다른 길을 가야만 했을까? 왜냐하면 세 자매 모두에게 '살아있는 감각'은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었다. 삶 절대적인 그 자체였다.


첫째 샬롯은 살아있다는 감각을 타인에게 인정을 받을 때 느꼈고, 둘째 에밀리는 개인적이지만 어떻게든 자기 자신과 가족이 살아있으면 되는 사람이었고, 셋째 앤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 다른 사람들까지 살리려 했던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어떤 살아있음이 중요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 하나, 이들의 공통점은 글을 써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여성들에게는 펜을 든다는 것은 곧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결혼, 곧 '부인'이라는 지위가 여성의 가장 중요한 직업으로 여겨졌던 19세기 영국에서 펜을 든다는 것은 생업을 포기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였고, 그나마 그녀들이 할 수 있는 '가정교사'라는 직업도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니었다.


이런 배경을 지닌 세 자매의 이야기를 연극 <언더독>은 다각도에서 심도있게 풀어내었다. 특히 세 자매의 얽히고설킨, 비단 19세기에서만이 아닌 현실에서도 벌어질 법한 사랑과 질투, 야망에 대한 스토리로 꽤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을 내내 무대 위로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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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롯을 연기한 '강나리' 배우, 앤을 연기한 '윤소희' 배우, 에밀리를 연기한 '박선혜' 배우



다만 제목이 <언더독>이란 점에서 '앤 브론테'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감상을 시작했지만, 첫째 샬롯 브론테의 캐릭터가 독보적이어서 잔상이 꽤 심하게 남았다. 좋은 의미였던 것 같다.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나오지 않지만 화가였던 남동생을 포함해 네 남매 장녀의 샬롯의 야망은 어마어마했다. 글을 써야만 했을 뿐 아니라, 성공하고자 했다. 특히 그 야망이 엄청나, 착하고 생쥐 같은 막내 앤 브론테를 '보호한다'라는 명목 아래 계속 그녀를 조종한다. 극 중에서는 심지어 그녀의 이야기를 뺏어 '제인 에어'를 만들었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특이점이 왔을 때, 샬롯의 전기를 쓰는 작가가 등장해 자신이 막내 앤을 소설 속 가상의 어여쁜 앤으로 만들었듯, 자가자신도 그렇게 다루는 전기 작가를 보고서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이미 동생들은 죽고 난 이후였지만. 여러모로 다양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연극이었다.


그 당시 여자들은 목숨을 걸면서까지 펜을 들고 창작을 했었었는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너무 쉽게 써지는 것 아닌가부터. 예술과 성공은 동의어인가? 우리는 자유를 찾기 위해 예술을 하기 시작했는데 왜 꼭 그 끝은 성공 아니면 파국인가.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갈라놓는 것이 예술이라면, 예술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시대적 사명을 다해야 하는 그런 거창한 것일까? 등의 많은 사유를 낳게 해 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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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5일 커튼콜, 김강민, 박선혜, 강나리, 윤소희, 양나은, 박찬우 배우 (왼쪽부터)

 

 

특히 앙상블 세 명을 포함한 여섯 명의 배우들이 무대 위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쥐락펴락하며 시종일관 흥미를 돋우었다. 덕분에 생각의 모험을 떠나면서도 한껏 몰입할 수 있었다. 의미부터 재미까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육각형 무대가 아니었나 싶다. 개인적으로는 샬롯이 앤이 죽고 나서 출판하지 못하게 한 막내의 <와일드펠 저택의 여인>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샬롯이 써낸 대중의 입맛을 사로잡아 흥행한 동화 속 당찬 여성이 아닌 당시 발언권조차 없었던 현실적인 여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어떤 사명감을 가지고 펜을 들었던 앤 브론테의 숨결을 작게나마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도 창작자로서도 취향이 있다면, 보다 자신의 의지를 타협하지 않는 쪽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기회가 된다면 꼭 한번 앤 브론테의 숨결도 확인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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