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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神曲)』은 영원한 ‘신곡(新曲)’이다.

 

이 진부한 말장난이 그럼에도 통용될 수 있다면 그 이유야 간단하다. 14세기에 나온 작품을 21세기에도 읽으며, 마침내 이 연극까지 이르렀으니.

 

『신곡』과의 첫 만남은 또렷하지 않다. 학창 시절 수업 시간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지식 교양 영상에서 접한 것 같기도 하고, 단순 상식이라며 커뮤니티에서 봤던 것 같기도 하고, 또 뭐가 뭐했던 것 같기도 하고. 같기도 하고……

 

대부분 그럴 것이다. 고지에 오르다 못해 꼭대기에 있는 작품. 제목을 모르면 분명 부끄럽지만, 내용을 모른다고 해서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작품. 읽은 척하기도 애매한 작품. 저자인 알리기에리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일화가 무진장 낭만적이라 호기롭게 읽으려다 슬그머니 놓아버린 작품.

 

그런 작품을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2022년 ‘열린책들’에서 굳이 세 권으로 나눴던 작품을 굳이 하나로 합본해 출간하였는데, 굳이 그 벽돌 책을 사는 사람이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고, 굳이 그 사람이 나였다는 것.

 

물론 ‘굳이’의 결과는 책장의 부피만 좁힐 뿐, 어떠한 진도도 나가지 못했다. 고전 한번 읽어야지 했던 다짐은 그 방대한 분량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글자만 대충 휙휙 읽고선 읽은 척이라도 할 수 있었겠으나 좀 길어야 말이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낱권으로 샀더라면 첫 권 정도는 읽지 않았을까 하는 일말의 변명을 얹어본다.

 

이런 맘가짐으로 연극 <단테 신곡>을 만났다. 그 내용은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에게 안내하는 사후세계 답사기’ 정도로 간추릴 수 있을 텐데, 정동환 배우가 베르길리우스 역을 맡았고 이에 맞대하여 한윤춘 배우가 단테 역을 맡았다.

 

「지옥」, 「연옥」, 「천국」이 대등한 분량으로 구성된 원작과 달리, 본 연극은 「지옥」에 주안을 두었다. 「연옥」은 베르길리우스와 단테의 대화로 범박하게 개략하고, 「천국」은 베아트리체와의 재회에만 집중한다. (21년도에 동일 주연 캐스팅으로 상연한 <단테 신곡 - 지옥편>과 궤를 같이하지 않을까 싶다.)

 

모르긴 몰라도, 원체 「지옥」이 유명할뿐더러 대중에게 각인된 인식 자체가 남달라서일 것이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럼에도 미루어보건대,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천국을 가고 싶다는 희망보다는 지옥에 가지 말아야겠다는 일념이 더 커서가 아닐지. 무엇보다 연극으로 형상화하기엔 지옥이 탁월한 부분도 한몫하였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극단 피악이 표현하는 지옥은 모질다. 검붉은 조명 아래, 죄인으로 분한 모든 배우가 실제 형벌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죄목이 나오는 인물이건 그렇지 않은 인물이건 나무랄 데 없이 고통으로 무대를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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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정은 관객석까지 생생히 전이되는데, 어딘가 뒤숭숭하다. 형벌을 받는 죄수의 모습에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왠지 모를 측은에 팔짱을 풀기도 한다. 이는 우리와 함께 그 광경을 목도한 단테 역시 매한가지이다.

 

죄의 기준은 무엇인가. 베르길리우스는 왜 우리를 지옥으로 인도하는가. 우리는 지옥에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베르길리우스는 단테에게 ‘거룩한 분노’를 느끼라고 조언한다. 분노면 분노지 거룩한 분노는 또 무엇인가. 이 어색한 ‘구(句)’가 포승줄이 되어 시종 나를 붙잡았다.

 

우리는 분노를 느낀다. 그 원인이 자신일 수도 타인일 수도 있다. 혹은 타인에게 투영된 자신일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분노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분출하는가, 삭이는가. 애초에 분노가 꼭 나쁜 것인가. 분노가 거룩할 수 있는가. 단순 기독교적 성격으로만 단어를 해석하면 그만일까. 혹여 ‘거북한 분노’는 아니었을까.

 

끊임없이 파생되는 질문에도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럴싸한 말로 ‘거룩한 분노’를 설명하며 지면을 갈무리하고 싶지만, 솔직히 모르겠다. 이상하게도 이 물음표가 이번 연극을 보길 잘했다고 인식한 지점이다. 이따금 이지적인 질문을 던지며 극에 몰입하게 하면서도 끝내 정답으로 마침표를 찍지 않는 작품은, 저마다 일시적인 답지를 만들게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불현듯 마주한 ‘충만한 행복’ 정도면, 다소간 설명할 수 있을까 싶어 애써 글을 이어 본다.

 

대단원에 이르러 천국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와 대화하며 ‘충만한 행복’을 언급한다. ‘행복’은 그 자체로 완전한 듯하여, 어떤 수식어도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충만하다’는 표현을 붙일 필요가 없지만, 단테는 구태여 사용한다. 이는 지옥과 연옥을 거쳐 천국에서 깨달은 단테의 지각이다. 누구나 말로는 할 수 있는 ‘행복’에 ‘충만하다’는 표현을 더 해 그 가치를 드높임으로써, 행복을 충만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충만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고 함의한다. 그렇다면 거룩한 분노 역시 거룩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단테 신곡>은 분노가 행복이 되는 감정적 괴리를, 거룩함과 충만함으로 수식하며 설득하려 한다. 분노조차 거룩하게 느낄 수 있는 자만이 충만하게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결국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진심이라고, 지금은 이렇게 판단을 유보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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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리나 그리스 신화 혹은 관련 역사 등 어느 정도 배경지식이 있으면 극을 풍성히 즐길 수는 있겠지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책으로 읽는다면 짐짓 멈칫할 부분이지만, 연극은 개의치 않고 우리를 끌고 간다. 이 멱살잡이가 연극의 순기능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의 길잡이라면, 이 연극은 대서사시의 그것이 아닐까.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책장에 꽂혀있는 고전의 먼지를 털겠다고 마음먹으나, 말인즉슨 연극으로 그것을 기억하겠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임을 다들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신곡은 더없이 달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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