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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 비해, 몇 안 되는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바로 ‘나 자신’에 관한 일만큼은 아주 선명히, 또렷이 기억을 잘 한다는 점이다.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것처럼 해당 기억을 생생히 보관하고 있는, 내 머릿속에는 '사진관'이 하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어릴 적 일을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근래 들어 알았다.

 

이를 테면 다섯 살 때 이사 온 집 바닥에 혼자 앉아 말랑말랑한, 영문 모를 액체로 가득 찬 불가사리 모양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던 기억이나, 어린이집 차 안에서 문득 스스로의 실존에 관한 고민을 했던 기억이나, 혼자 유치원 교실을 온 종일 돌아다니며 가상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영화를 구상했던 기억말이다.

 

공중파 방송은 커녕 어디 이름 모를 채널이나 다큐멘터리, 심지어는 유튜브 브이로그에도 등장하지 못할 소소한 에피소드들이었지만 내 사진관에는 그러한 사진들마저 다 소중한 작품들로 겹겹이 쌓여있다. 소수의 사람만이 반응하고, 방문할 수 있는.

 

올 봄 엄마와 단 둘이 떠난 제주도 여행. 푸른 초원위를 거닐며 조랑말을 타는 와중에도 초등학교 시절 역사 논술 시간에 배운 삼국시대를 떠올렸다.

 

바게트로 뗀석기, 간석기 용품을 만들고 남은 빵조가리들을 초콜릿 퐁듀로 먹던 기억. 그림을 아기자기하게 잘 그리고 다양한 팬시 용품들로 꾸미는 것을 좋아하던 나에게 ‘너는 참 백제와 잘 어울리는 아이야’라던 한 선생님의 말씀을 떠올린다. 찌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애써 제주도의 한 조랑말 위로 올라탄 스물일곱의 여자는 바삭바삭한 간석기 시대 칼을 달콤한 초콜릿에 찍어먹는 열 두살 소녀가 된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종종 시간 여행을 떠날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찍고 싶은 사진이 줄어들고 소소한 행복과 스토리를 담던 아기자기한 사진관은 허물어간다. 어느덧 사진을 찍기보다 빛 바랜 사진을 거슬러올라 들여다보기만 하는, 시시한 어른이 된 나에게도 새로운 장면이 펼쳐질까, 새로운 사진을 찍게 될까. 막연하면서도 까마득한 기대를 해본다. 나는 다시 사진사가 되어보고 싶다. 나의 부질없고,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사진관은 365일, 24시간 열려 있다. 지금 잠시 쉬어 가는 것일 뿐.

 

단 한 명의 새로운 방문객이라도 더 나를 들여다 보아주길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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