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학과에서는 끊임없이 시나리오를 쓴다. 교수님들이 몇 주 뒤까지 써 오라고 갑작스럽게 지시하실 때도 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라는 말처럼 들린다. 처음에는 이 ‘시나리오’라는 과제 때문에 정말 애를 먹었다. 주제도 주지 않고 도대체 뭘 쓰라는 건가 싶었다.
지금 당장은 시나리오 과제가 없어도 언젠가는 주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무엇을 쓰면 좋을까, 어떤 주제가 흥미로울까’ 하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에는 막막하고 하기 싫던 고민이 점차 당연한 일상이 되었고, 그 속에서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것은 과제가 아니라 가장 재미있는 취미가 되었다.
물론 인간이라면 완전히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영화, 책, 음악, 전시 등 예술에 속하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향유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그것들은 많은 영감을 주었다. 특히 책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었다. 영화는 이미 완성된 매체이기에 자칫하면 기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될 위험이 있었다. 반면 책은 표현 방식과 인물의 심리 묘사를 통해 전혀 새로운 경험을 안겨 주었다.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이런 성격도 존재할 수 있구나.” 이런 깨달음들은 내가 인물을 설정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결국 내 성격의 틀 안에서만 사고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갇혀 있던 그 틀을 책이 깨 주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영감은 역시 내 안에서 온다. 타인의 작품을 통해 느끼는 감정은 결국 내 것이 아니기에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스쳐 지나가는 감정조차 그 순간의 생각과 행동을 곱씹으며 기록했다. 그러자 내 감각은 훨씬 세심해졌고, 남들의 마음과 행동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내 모든 경험이 영감의 씨앗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도움이 되는 건 격한 감정이다. 격한 감정 속에는 사소한 생각부터 큰 깨달음까지 아낌없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단연 ‘사랑’을 가장 소중한 감정으로 꼽는다.
사랑은 수많은 감정들의 집합체다.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부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연인에게서 행복도 느끼지만 분노도 느끼고, 충만함도 느끼지만 동시에 외로움도 느낀다. 그리고 이런 모든 감정은 결국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이유로 귀결된다.
또한 내가 진심을 담아 연인에게 전한 한마디는 곧 나만의 대사가 되기도 한다. 연인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몇 번이고 고민 끝에 내뱉은, 담백하지만 온전한 진심이 담긴 그 말은 그 어떤 대사보다도 빛난다.
결국 시나리오는 거창한 상상력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모든 순간이 곧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었다. 사랑에서 비롯된 수많은 감정과 경험들은 나를 가장 진솔한 작가로 만들어 주었고, 앞으로도 내가 쓰는 모든 이야기의 밑바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