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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_공연사진(6)_제공 (주)파크컴퍼니.jpg

 

 

사람은 누구나 꿈을 꾼다. 그 꿈은 지루한 일상을 버틸 힘을 주는 소박한 기쁨일 수도 있고, 혹은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게 하는 큰 희망일 수도 있다. 결과와 상관없이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즉 위험하지 않은 꿈을 꾸는 이들에겐 흔히들 이렇게 말한다. 멋있다, 도전 정신이 있다고.


하지만 위태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 무언가에 인생을 걸고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들에겐 이렇게 말한다. 무모하다, 철없다, 현실 감각 없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 이처럼 ‘돈키호테’의 앞길을 막는 건 풍차뿐만이 아니다. 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그에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돈키호테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에스터’ 또한 돈키호테형 인물이다. 에스터는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 에스트라공 언더스터디 배우다. 그는 블라디미르 언더스터디 배우인 ‘밸’과 함께 허름한 지하 분장실에서 무대에 오르는 순간만을 기다린다. 극에서 흐르는 시간은 하루지만, 실제로 그들은 훨씬 많은 날을 기다려왔다. 연출을, 무대를, 관객의 박수를, 평론가들의 찬사를, 객석에 찾아올 사랑하는 가족을, 배우란 꿈을.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끝없는 기다림을 각자만의 방식으로 견딘다. 업계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언더스터디 밸은 아직은 현실에 맞닿아 있다. 그에겐 매일 객석을 찾아오고 용돈도 주며 지원해 주는 가족이 있다. 언더스터디가 지켜야 할 규칙을 깨고 지상으로 발을 옮기면 새로운 길이 열린단 걸 기다리는 도중 깨닫기도 한다. 밸은 지하 분장실과 지상 사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현실과 꿈의 경계에 선 인물인 것이다.


한편, 잔뼈가 굵은 언더스터디 에스터는 분장실 밖으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고도를 기다리며> 에스트라공의 신발을 신기 위해 끙끙댄다. 신데렐라 언니가 맞지 않는 구두에 발을 욱여넣는 것처럼. 밸을 상징하는 소품은 모자다. 하지만 밸은 모자를 자유롭게 쓰고 벗는다. 에스터는 극 내내 신발을 신으려 애쓰고, 무대 조감독이 신발의 행방을 묻자 얼버무리고, 사라진 신발을 미친 듯이 찾아 헤매며 집착한다. 에스터에게 맞지 않는 신발은 평생을 매달린 꿈이자, 많은 걸 포기하고 버텨온 인생 그 자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_공연사진(5)_제공 (주)파크컴퍼니.jpg

 

 

많은 이들은 돈키호테를 비웃는다. 하지만 그의 곁엔 아무리 험난한 길도 따라오는 충직한 ‘산초’가 있다. 밸의 산초는 매일 극장을 찾는 가족이며, 에스터의 산초는 오랜 시간을 버텨온 고집, 신념, 의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덮친 예측 못 한 슬픔에도 쓰러지지 않는다. 내내 휘청대고, 실없는 언행도 해가며 ‘늙어가는 시간’을 흘려보내던 에스터와 밸은 그제야 단단히 버티고 선다. 자신들만의 무대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기하는 에스터와 밸은 암전될 때까지 연기를 멈추지 않는다. 분장실은 어두워지지만, 그들은 ‘통곡으로 가득한 허공’을 대사로 채우며 희망이란 조명을 어슴푸레 밝힌다.


2025년 9월 16일에 개막해 11월 16일에 막을 내리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재연은 초연의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며 재정비된 모습을 보여줬다. 에스터 역의 배우를 중심으로 페어가 고정됐던 초연과 달리, 재연은 페어가 매번 바뀐다. 안정적으로 극을 운영하며, 다양한 무대를 보여주기 위한 선택일 것이다.


무대는 초연의 형태를 거의 그대로 따르면서도 일부 소품을 추가했고, 몇몇 장면 또한 자연스럽게 수정되며 개연성을 부여했다. 초연 땐 <고도를 기다리며> 신구와 박근형의 공연 음성이 에스터와 밸의 분장실까지 들리는 설정이 있었는데, 재연엔 해당 음성이 삭제됐다.


초연 땐 에스터를 연기했던 두 배우의 연령대가 극과 극으로 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연 또한 연령대가 다른 두 배우(박근형·김병철)를 캐스팅했다. 박근형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블라디미르 역을 오래 연기한 바 있다. 따라서 관객들은 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출연 소식을 더 반겼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_공연사진(9)_제공 (주)파크컴퍼니.jpg

 

 

무대 조감독 ‘로라’ 역을 연기하는 배우들(김가영·신혜옥)의 연령대가 초연보다 올라간 것도 재연의 특징이다. 재연의 로라는 어린 스태프들 사이에서 서럽게 일하는 설정이 추가돼 페이소스를 자아냈다. 로라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소년과 럭키, 포조까지 합쳐 놓은 듯한 인물로, 분장실과 무대의 경계를 오간다. 그는 연기는 아무나 할 수 있고, 무대를 운용하는 것은 어렵다며 무대 뒤 상황을 컨트롤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초연 땐 이 장면이 코믹한 단독 퍼포먼스였다면, 재연은 연기 톤 변경 및 에스터와 밸도 대사를 함께 하는 것으로 바뀌며 찡한 감정을 선사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이처럼 초·재연 모두 역할 연령대를 폭넓게 설정하며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잡았다. 에스터와 밸, 로라는 꿈을 꾸며 언젠가 찾아올 좋은 날을 기다린다. 같은 역할이라도 연령대를 달리하는 것은, 희망을 갈망하는 건 나이와 상관없단 걸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연 땐 늦깎이 신입 밸과 젊은 꼰대 에스터 페어가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재연 또한 에스터(박근형·김병철)와 밸(이상윤·최민호)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연령대가 전부 달라 페어마다 감상도 달라질 것이다. 9월 18일에 무대에 오른 김병철과 이상윤, 신혜옥은 때론 유쾌하지만 씁쓸한 웃음을, 때론 공감과 연민의 감정을 안기며 깊은 몰입과 여운을 남겼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_공연사진(7)_제공 (주)파크컴퍼니.jpg

 

 

결말은 극 중 인물들에게도, 객석 관객들에게도 큰 충격을 준다. 얼핏 보면 저런 일이 생겼는데도 에스터와 밸은 왜 계속 연기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달리한다면 에스터와 밸이 무슨 심정으로 자신들만의 무대를 만드는지 공감할 수 있다.


우리는 슬픈데도 아무렇지 않은 척 꾸역꾸역 살아간다. 슬픈 사람에게 왜 숨을 쉬냐고 묻는 사람은 없다. 에스터와 밸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겐 연기가, 꿈이 곧 ‘숨’이다. 그들에게 연기를 왜 하냐고 묻는 건 왜 사냐고 묻는 것과 같다. 아픔을 끌어안은 채, 서로의 손을 잡고 버티면서 사는 게 인생인 것이다. 에스터가 밸을 일으키고, 밸이 에스터를 따르고, 그런 그들을 로라가 말없이 바라봐주는 것처럼.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는 희극이자 비극이며, 비극이자 희극이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에스터와 밸도 손에 잡히지 않는 ‘배우’란 꿈을 기다린다. 지상으로 올라가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에 서도, 인생 전체에 빛이 들 거라고 장담할 순 없다. 그럼에도 어두운 지하 분장실에서 빛을 향해 손을 뻗는 에스터와 밸을 보고 있으면, 웃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다. 누구나 그들처럼 자신만의 무대에 오르길 지금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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