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나는 ‘하고 싶으면 하는 사람’이다. 무슨 일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그 일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 그래서일까, 세상에 호기심이 많은 만큼 이제까지 많은 경험을 했다. 하나의 예시를 말해 보자면 15살 나이에 번지점프를 뛰었고, 22살 나이에 패러글라이딩을 했다. 언젠가 하늘에서 뛰어 보겠다는(스카이다이빙!) 꿈도 반드시 이루리라 믿는다.
하지만 ‘하고 싶어도 못하는 일’들이 있다. 여건이 되지 않거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서 당장은 못하는 일들. 그래서 ‘언젠가’라는 불확실한 미래 부사를 붙여 '리스트화'하는 일들. 그런 일들을 ‘버킷리스트’라고 하는 것 같다.
뮤지컬을 좋아하게 되면서 (연뮤덕이라면 모두가 꿈꾸고 있을 거라고 믿는) ‘뮤지컬의 고장인 웨스트엔드나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보기’가 버킷리스트에 올랐다. 둘 중에서도 특히 웨스트엔드에 가고 싶었는데, 이유는 런던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보통 자연 경관이나 유명한 랜드마크를 보고 감명을 얻기보다 경험이나 추억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딱히 여행을 가보고 싶은 나라는 없지만, 런던은 유일하게 나의 어린 시절 추억에 존재하는 환상의 장소이기 때문에 가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 해리 포터와 셜록 홈즈를 보고 자란 나는 당연하게도 런던의 이층버스와 빨간 전화 부스와 같은 이미지에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던 소설의 도입부가 언제나 런던의 안개 낀 눅눅한 날씨에 대한 묘사로 시작했기 때문에(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막상 런던의 날씨를 좋아하지 않겠지만) 항상 런던이라는 장소가 궁금했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을 하는 편이었지만 런던은 유독 환상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나와 함께 뮤지컬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같이 가자’고 말을 하면서도 기약 없는 소망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버킷리스트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때는 바야흐로 작년 상반기.
어렸을 때부터 나는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특성이 있었다. 아마 사주상 역마살로 추정된다. 모로 가든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나를 두고 부모님은 어렸을 때부터 나를 떠나보낼 준비를 한 듯했고, 예고를 가고 싶다던 나는 집에서 10분 거리인 여고를 다니다가 성인이 되어 마침내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됐다.
오랫동안 예체능을 꿈꿔 왔던 나는 항상 외국에 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일 년, 일 년이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해 쉽사리 한국을 떠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 예체능에 대한 외길 인생을 접고 학문 공부에 흥미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라면 뭐든 해보자!'고 생각했다.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기에만 집중하느라 숨을 고르지 못했던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서야 해외에 나갈 준비를 하게 됐다.
5개월간 독일에서 공부를 하게 되어 유럽행 비행기에 탔을 때는 믿기지 않았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낯선 나라에 도착했을 때도 현실감이 금방 느껴지지 않았다. 흥분했거나 기분이 좋았다는 말이 아니다. 말 그대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유럽에 있으면서 가까운 나라를 여행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고, 그렇게 꿈꾸던 런던행을 계획하게 된다. 다행히 동행인이 뮤지컬 관람 제안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런던을 여행하면서 무려 5번의 뮤지컬을 관람했다(체류 기간 동안 런던을 두 번이나 갔다).
웨스트엔드는 한국의 대학로와 느낌이 많이 달랐다. 뮤지컬 장르에 대한 접근성이 한국보다 훨씬 낮아 보였고, 그만큼 장기 공연을 하는 작품들이 많아 공연장 입구에서부터 공연에 맞게 꾸며져 있었다. 오래된 유럽풍 공연장 내부 시설이 주는 느낌도 많이 달랐다.
공연 관람 문화도 차이가 있었다. 한국과 다르게 간식을 먹거나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등 자유로운 분위기로 관람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인터미션에는 어셔가 돌아다니며 아이스크림과 초코볼 같은 간식을 팔기도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Back to the Future’와 ‘Wicked’이다. ‘Back to the Future’는 잘 알려진 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작품인데, 미국 분위기가 강해 한국에서 라이선스 공연을 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만약 한다고 하더라도 느낌이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지 배우들이 온힘을 다해 보여주는 춤과 노래, 화려한 무대장치가 눈을 사로잡았다. 공연을 보고 나오자 그제서야 웨스트엔드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이국에서 느끼는 특별한 감정을 잃어버릴까 봐 얼른 친구에게 전했다. 그때 언어화를 했음에도 시간이 흐른 지금은 조금 흐려진 상태라는 게 문득 아쉽다.
어렸을 때 정말 좋아했던 ‘오즈의 마법사 시리즈’. ‘Wicked’는 ‘오즈의 마법사’의 스핀오프 격 이야기이기 때문에 처음 이 작품을 알고 난 이후로 꾸준히 좋아한다. 그래서 런던에서 ‘Wicked’를 직접 보게 되었을 때 이전에 이 작품을 한국에서 관람했음에도 무척 행복했다. 행복한 감정은 환상이 아니었고 내 안에 실제로 존재했다.
얼떨결에 유럽에 머물면서 버킷리스트를 이루고 난 후로 ‘이 세상에 못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도 실제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상황은 나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버킷리스트에 또 다른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 ‘나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윌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나에게는 아직 버킷리스트가 한참 남아 있다. 아마 눈을 감을 때까지도 버킷리스트에 무언가 적혀 있을 것 같다. 일상을 살아가는 중에 ‘정말로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 버킷리스트를 떠올린다. 100세 인생 시대에 태어난 게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