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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루카고 나는 딸기라고 명명하며 시작하고 끝나는 「루카」는 읽는 내내 질문을 던진다. 목사인 아버지가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있을까, 라는 물음과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삶이 어떤지,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본 적이 없는지, 더 나아가 죽어버린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를 말이다. 질문은 끝내 갈고리가 되어 우리를 세상이라는 수면 위로 끌어 올린다.


다름이 틀림이 되어 차별이 만연한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파수꾼을 보게 된다. 예성, 루카, 루카의 아버지, 루카를 사랑하던 ‘나’는 죽었다. 끝없이 펼쳐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죽었다. 새로운 내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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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인물 스스로를 명명하는 게 아니라 ‘너’를 명명하면서 시작하는 소설에서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예성이가 죽었습니다.”(86쪽)라고 말하면서 작가는 독자에게 예성에게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붙인다. 하지만 이는 결말로 가면서 점차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구조를 선택한 것이다. 마지막에 ‘나’와 예성의 아버지 사이의 치열한 대화를 통해서 독자는 죽음이 신체적 죽음이 아니라는 반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작가는 독자가 소설을 다 읽고 다시 한번 처음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하게끔 유도하고 이끈다. 예성이 죽었다는 잘못된 전제, 가설을 지운 상태로 새로운 소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루카」는 쓰고 싶게 만드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카」에 나오는 인물은 모두, 아니 우리들 역시 많은 가면을 가지고 살아간다. 착한 누구, 성취욕이 강한 누구, 신앙심 있는 누구처럼 작가는 한 인물에게도 다양하게 착용할 수 있는 가면을 쥐여준다. 사실 사람, 인물을 어떻다고 명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의 가면만을 가지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사실을 알고 소설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억나는 첫 시작을 떠올려보면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사람들에게 내 본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했고 가면으로 숨기고자 했다. 하지만 이를 가지고 글을 쓰는 것은 어려웠다. 자전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이형 작가는 이를 퀴어 소재와 결합시켜서 풀어냈다. 즉, 루카가 루카인 것, 딸기가 딸기인 것, 동성애자가 동성애자인 것에 잘못은 없다는 사실을 말한다. 여기서 나는 작가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에게 어떻게 설득시키고 공감을 만들어내는지 알게 되었다. 질문에 대한 자신만의 믿음이 담긴 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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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는 언젠가 ‘나’에게 “죽어버린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93쪽)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시점인물은 대답하지 못한다. 아마 윤이형 작가는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며 소설 역시 그렇게 말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죽어버린 것은 루카, 즉 이전의 얼굴에서 성장한 사람이다. 그래서 다시 살아나게 되었고 죽음은 생명체의 숨이 멎는 순간이 아닌 변화하고 성장하며 다양성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루카였고 예성이었던 너는”(104쪽) 그곳에서 새로운 얼굴로 살아내고 있다. 


시점인물인 ‘나’는 연인 간의 사랑에 대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루카의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사랑에 ‘반드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믿음’을, 목사라는 직함으로 ‘인간은 아담과 하와처럼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그가 목사라는 직함을 내려놓고 생각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을까?


예성이자 루카인 그가 가지고 있던 믿음은 ‘죽음으로 살아나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처럼 작가는 소설에서 인물들이 가진 각자의 믿음을 행동과 생각으로 드러낸다. 끝내 루카의 아버지는 종교에 대한 믿음의 틀에서 루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와 헤어졌지만, 나름대로 살아간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무언가를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에서 50%는 없다. 90%의 믿음으로 천국이나 지옥을 간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윤이형 작가처럼 인물에게 각자의 믿음의 기준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여러 장치를 심어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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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심을 잘못 깎게 되면 툭, 하고 부러진다. 부러진 연필심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내 손의 연필엔 비어버린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을 없애기 위해서 다시 칼을 들고 연필을 깎아낸다.


우리의 관계에서도, 소설 쓰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루카의 연필은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 깎여나갔다. 그렇기에 자유롭지 못했고 ‘너’와 ‘나’의 대화는 끊겨 나갔다. 소설을 쓸 때는 날카롭게 깎인 연필로 끊임없이 쓰고 수정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잘못 깎았다면 사소한 실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연필 깎는 스킬을 만들어야 하고 끝내 나만의 연필을 가져야 한다.


물론 연필심을 잘못 깎으면서 배우는 점도 있다. 소설을 읽고 쓰면서 ‘아, 이렇게 인물을 움직여야 하는구나.’ 등을 배워야 한다.


이 모든 인물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나면 우리는 반드시 가슴으로, 머리로 소설 「루카」를 정의한다. 나는 ‘이해는 되지만 가슴이 아픈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텍스트를 여러 번 읽으며 주변의 다양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본적으로 모태신앙인 내게 「루카」는 종교를 떠나서 한 명의 아버지, 아들, ‘나’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어려운 소설이었다. 목사인 삼촌과 두 자식을 둔 내 아버지, 퀴어 친구에게, 소설을 쓰고자 하는 나 스스로에게 소설을 읽으며 생긴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대화 끝에 나에겐 “루카, 딸기를 있는 그대로 봐야지 종교의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라는 사실이 남았다.


기독교인 나에게 아무리 인간의 믿음에서 왈가왈부해도 결국 믿음의 기준은 각기 다르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루카」를 읽으면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만약 내가 나이가 더 들어서 이 소설을 읽었다면, 더 많은 경험을 하고 나서 루카를 떠올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었다. 루카가 조카의 돌잔치를 갔을 때를 떠올려보면 그는 ‘나’에게 가고 싶지 않은 곳에 가본 적이 없냐고 묻는다. 그때 시점인물은 별로 많지는 않은 것 같다고 대답한다. 진심으로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아직 가지 싶지 않은 곳에 간 경험이 부족해서 루카의 질문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종종 경험이 부족한 독자로서 소설을 읽을 때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동시에 해당 경험을 이해하고 싶다는 성취감을 느끼기도 한다. 점차 인물을 정확하고 면밀하게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소설 읽기는 나에게 부족함과 목표를 가져다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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