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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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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이야기에 이 개념을 적용하면, 모든 이야기엔 ‘개연성(실제로 일어날 법한 일을 다루는, 문학의 보편성을 가리키는 개념)’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저 사람이 도대체 왜 저러는지, 저런 행동을 하는 게 말이 되는지 의심이 커지면 이야기에 몰입할 수 없다. 의심을 무시할 정도로 캐릭터와 전개가 매력적이더라도, 최소한의 논리적 인과관계는 갖춰야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고소설의 특징은 우연성이다. 이는 우연한 상황이 연이어 맞아떨어지며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주인공이 궁지에 몰릴 땐 누군가가 나타나 이유 없이 도와주고, 헤어진 주인공들은 어떻게든 재회하며, 오래 못 봤어도 사랑하는 이의 얼굴은 금세 알아보는 것.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 ‘개연성에 어긋난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삶에서 이런 행운이 연이어 일어난다면 어떨까. 이럴 땐 개연성보다 감정을 선택한다. 이해는 안 되지만 기쁘다, 운이 좋다고 표현한다. 혹은 그런 우연을 통틀어 ‘기적’이라 말하기도 한다.


조선 중기 문신 조위한이 1621년에 지은 고소설 <최척전>엔 기적 같은 우연이 이어진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정유재란(1597년 발발) 등 조선시대 전란으로 인해, 주인공 ‘최척’과 ‘옥영’을 비롯한 가족들은 헤어진다. 그들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도 살아남아 다시 만난다. 30여 년 동안 조선, 일본, 중국, 베트남까지 여러 시공간을 오가면서도 서로를 잊지 않는다. 부부는 서로의 생사조차 몰라도 배우자에 대한 신의를 지키며, 마음으로 계속 사랑한다. 부모와 자식 또한 서로를 가슴에 묻은 후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보자마자 알아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대단히 비범한 능력을 갖춘 인물들은 아니다. 평범한데 용감하고, 보통 사람인데도 의리가 있으며, 목숨을 걸고 가족을 사랑할 뿐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잡초 같은 생명력과 의지가 모여 연이은 행운과 기적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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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선웅이 각색하고 연출한 연극 <퉁소소리>는 <최척전>을 충실히 따랐다. <퉁소소리>는 극중극 형식으로, 노인 최척이 막을 열며 자신의 인생을 들려준다. 공부를 멀리하고 철없는 도련님이었던 젊은 척은 어느 날 스스로 글공부에 재미를 붙인다. 이웃집에 사는 옥영은 천 번, 만 번 고민하고 그에게 시와 편지를 보낸다. 척과 옥영은 사랑에 빠지고, 혼인을 언약한다. 하지만 척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의병으로 끌려간다. 홀로 남은 옥영은 부잣집 남자의 접근과 어머니 반대에 자살 시도까지 해가며 척을 기다리고, 돌아온 척과 혼인에 성공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극 초반부가 척과 옥영의 캐릭터, 또한 30여 년 간의 서사를 요약한 것과 다름없다. 척은 타고난 기질은 평범하지만 비범하게 행동하고, 옥영은 원하는 것은 꼭 쟁취하는 적극적인 여성이다. 여러 상황이 그들을 갈라놓아도, 그들은 다시 만난다. 이 구조가 결말까지 반복되지만, 관객은 이들의 이야기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고난을 헤쳐 나가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력, 서로를 사랑하는 연인이자 부부·부모와 자식의 애틋한 이끌림은 시대를 불문하고 모두가 공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며 척은 중국으로, 옥영은 여자란 걸 숨기고 일본으로 간다. 부부는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는 처지가 돼도 서로를 잊지 못한다. 그들은 머나먼 안남(베트남)에서 수년 만에 재회한다. 연애 때 주고받았던 시를 옥영이 읊는 소리를 척이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옥영이 여자인 줄 모르고 몇 년을 조수로 데리고 다녔던 일본인 상인은 그녀를 시원하게 보내주고, 척 또한 아내를 기쁘게 맞이한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우연과 판타지의 연속이다. 특히 여성들이 실제로 전쟁 때 어떤 취급을 받고, 무사히 살아왔어도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생각해 보면 더 그렇다. 정유재란보다 늦은 시기에 일어난 병자호란(1636~1637) 당시, 청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여인들은 무사히 조선으로 돌아와도 환영받지 못했다. 정절을 잃고 더럽혀졌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은 MBC 드라마 <연인(2023)>, 창작 뮤지컬 <여기, 피화당(2024)>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비하면 <퉁소소리> 인물들은 쿨하다. 그래도 관객은 척과 옥영의 재회에 개연성 같은 건 안 따지고 순수하게 감동한다. <최척전>이 쓰였을 당시, 전란으로 고통을 겪던 민중의 바람이 이야기에 담긴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쟁으로 몸과 마음을 다치고, 가족과 연인과 벗을 영원히 잃었을 것이다. 이야기에서만큼은 사랑하는 이들을 되찾길, 몸과 마음을 치유받길, 위기에 빠질 땐 귀인이 나타나 주길,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귀인이 되길 바랐을 것이다. 이런 소박한 희망이 우연의 연속, 다른 말론 ‘기적’이 돼 <최척전>에 담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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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한 척과 옥영은 차남 몽선을 낳고 행복하게 산다. 하지만 척은 중년의 나이에도 전쟁터에 끌려간다. 명·청 교체기, 명군에 징용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척은 포로수용소에서 아기 때 잃어버린 장남 몽석과 재회해 탈출하고, 몽선 아내 홍도의 아버지인 진위경을 만나고, 고향인 조선 남원으로 돌아간다. 척을 만나기 위해 아들 몽선, 며느리 홍도와 함께 바다를 건넌 옥영 또한 남원에 다다른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만나며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


젊을 때부터 적극적이었던 옥영은 중년이 돼서도 생을, 사랑하는 가족들을 쟁취했다. 그렇지만 위기는 많았다. 한때는 성별을 속여야 했고, 조선으로 배를 타고 갈 땐 해적에게 가진 걸 다 빼앗기고 죄책감에 죽으려 했다. 하지만 며느리 홍도의 설득 끝에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이처럼 강인하고 적극적인 여성들이 행복을 얻는다는 것 또한 작품의 뚜렷한 특징이다.


연극 <퉁소소리>는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무대 미술, 6인조 국악 라이브 연주로 눈과 귀가 즐거워지는 연극이기도 하다. 또한 척의 행복, 서글픔, 그리움, 회한 등을 모두 표현하는 수단인 퉁소 연주 또한 장면마다 다른 감정을 더하며 마음을 울린다.


2025 백상예술대상 백상연극상·2024 평론가가 뽑은 한국연극 베스트3에 선정된 연극 <퉁소소리>는 9월 28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검증된 수상 이력,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세련되고 위트있는 연출에 더해 <퉁소소리>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또 있다. <퉁소소리>는 살아있으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 거란 걸 말해주는 선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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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문화회관 맞은편에 자리한 ‘광화문 글판’ 2025년 가을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이상하지, 살아 있다는 건, 참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란다’라고. 이는 최승자 시인의 시 <20년 후에, 지(芝)에게> 중 일부를 발췌한 문구다. 연극 <퉁소소리>가 공연되는 9월, 극장 안팎 모든 곳에선 생을 찬미하며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살아있으면 개연성 따윈 무시하게 되는 ‘기적’처럼 좋은 날이 반드시 온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건 이상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아름다운 일이다. <퉁소소리> 극 중 대사처럼, 그래서 당신은 오늘도 ‘괜찮아, 다이죠부, 메이콴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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