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의 줄거리와 배경
1327년 이탈리아 북부의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 있다. 이들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사인 윌리엄과 제자인 아드소로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청빈을 반박하는 로마 교황청의 반목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으로 향한다.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상쩍은 모습을 간파한 윌리엄은 채식 수사 아델모의 사망 사건에 대한 해결을 맡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어떤 ‘금지된 책’과 관련이 있었고 그 책을 읽거나 책에 다가간 사람들이 공통으로 살해된다는 실체를 밝혀낸다. 수도원의 맹인 노 수도사 호르헤는 이 책이 웃음으로 인해 신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책을 비밀 서고에 감춘 채, 페이지에 독을 발라 접근하는 자를 죽이도록 만든 것이다. 교황청의 이단 심문관 베르나르 기는 수도사들의 죽음을 ‘악마의 소행’으로 몰아가며, 아무 연관이 없는 수도사 레미지오, 정신이 온전치 않은 살바토레, 그리고 농촌 소녀까지 무고하게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한다. 이후 수도원은 거의 붕괴하고, 윌리엄과 아드소는 그 자리를 떠나게 되며 영화는 노년의 아드소가 이 이야기를 회고하는 내레이션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배경은 1327년, 중세 북이탈리아다. 이 시기는 교황 요한 22세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4세 사이 프란치스코파 논쟁, 일명 청빈 논쟁이 한창이었다. 이 논쟁은 아비뇽 유수라는 프랑스 성직자 과세 문제로부터 시작된다. 청빈 논쟁은 1320년대 교황 요한 22세와 루트비히 4세를 지지하는 프란치스코회 사이에서 일어난 교리 논쟁이다. 프란치스코회 영성파는 성서를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의 무소유와 청빈함을 내세워 세속권력화된 교황청과 다툼을 벌였고 1323년 11월에 요한 22세는 칙서를 통해 프란치스코회의 절대적 무소유는 이단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영화의 베네딕트 수도원은 교황파와 황제파를 조율하기 위한 기관이며, 이곳에서 일어난 연속사망 사건은 두 파의 중간에 서서 피해를 본 신도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원작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기호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만큼 그의 배경과 지식을 살려 탄탄하게 쌓은 이 중세와 근대의 중간지점이라는 배경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란치스코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잉글랜드 관구장 오컴의 윌리엄을 떠오르게 하는 주인공 ‘윌리엄’을 설정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영화의 배경을 바탕으로 교황청과 토론하는 윌리엄과 아드소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갑작스럽게 살인사건이 일어나며 탐정물과 같은 수수께끼들이 등장해서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이 미스터리의 중심에는 단순한 연쇄 살인이 아닌, 인류의 사유와 해석을 둘러싼, 오래된 싸움이 놓여 있었다. 사건의 실체는 다름 아닌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편, ‘희극론’이라 불리는 유실된 문헌의 존재로 좁혀진다.
양극단의 시대에서 해석의 자유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제1편에서 비극이 인간의 두려움과 연민을 통해 카타르시스(정화)를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지는 2편에서는 그 반대로, 웃음과 희극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정신의 자유를 자극한다고 본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희극론’은 중세 기독교 질서에선 위험한 사고로 간주했는데, 그 이유는 웃음이 질서의 해체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웃는다는 행위는 곧 신의 질서에서 벗어난 것, 나아가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금지된 책’을 씹어먹고 도서관을 방화한 인물, 맹인 노 수도사 호르헤는 이렇게 말한다.
“웃음은 두려움을 없애고, 두려움이 없으면 신도 없다.”
호르헤에게 웃음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독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책의 페이지에 독을 발라, 책을 읽은 자가 죽게 함으로써 지식이 퍼지는 것 자체를 봉쇄하려 했다. 희극은 권력을 위협하는 해체를 상징하기 때문에 웃음, 의심, 탐구, 해석이라는 요소들은 이단으로 간주해야만 했다.
이에 반해 주인공 윌리엄은 중세의 과도기에서 근대를 상징한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처럼, 의심을 멈추지 않고 탐구와 분석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려 한다. 한편 아드소는 그에 비해 아직 경험이 부족하고, 신앙을 통해 세계 사이를 해석하는 근대 이전의 인간상이다. 하지만 소녀와의 관계 이후 혼란을 겪고 이야기 말미에 이르면, 아드소는 윌리엄의 방식에 영향을 받아 세계를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변화한다. 이는 의심보다는 믿음을 따르는 이단 심문관인 베르나르 기나 교리주의자인 호르헤와는 대비를 이룬다. 아드소는 사랑했던 소녀의 이름을 묻지 않았고, 마지막 내레이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녀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장미는 이름이 없고, 이름은 단지 바람일 뿐이다.”
이는 곧, 이름 붙이는 행위의 불완전성, 절대적 의미의 부재를 인정하는 기호학적 깨달음을 함축하고 있다. 따라서 윌리엄과 아드소는 각각 의심하는 이성의 상징과 혼란 속 성장하는 인간상으로 기능하며, 이 이야기의 철학적 깊이를 형성하는 두 축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핵심 주제는 기독교적 진리에 대한 양극단적인 가치에서부터 출발한다. 청빈 논쟁과 이단 심판, 마녀사냥 등 중세 말로 갈수록 외피로서만 신에 대한 논리와 믿음을 강조할 뿐이었다. 이는 예수가 사유재산을 갖고 있었는지 아닌지로 서로의 신실함을 내세웠지만 자신들의 입맛대로 해석하여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취득하는 의도가 있다. 실상은 교황청과 황제 모두 서로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는 양극단적인 행위는 본질, 즉 진리와 관련된 가치를 찾지 못하게 한다.
결론적으로 영화의 주제는 어떤 대상에 대한 엇갈리는 의견과 가치에서 무비판적인 사고는 진리를 찾을 수 없으며, 진리가 없을지언정 의심하고 해석하는 태도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아드소에게 ‘장미’는 상징이자,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끊임없이 해석되는 것, 결국은 의미조차 허무 속에 흩어지는 것이었다. 에코는“기호(sign)는 끊임없이 다른 기호로 미끄러진다”는 식의 기호학적 사고를 통해, 절대적 진리란 없으며, 우리는 다만 끝없는 해석의 연쇄 속에서 ‘읽고’, ‘의심하고’, ‘또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제를 깨닫기까지, 영화를 단순한 미스터리 추리물에서 이념 논쟁과 기호학적 철학을 논하는 메시지를 찾기까지 쉽지만은 않았다. 따라서 주제를 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보기에는 조금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말하는 인본주의와 사랑과 이념 없는 순수한 믿음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은 어느 정도 읽힌다. 나는 이러한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주제를 처음에는 어렵게 받아들였지만, 오늘날의 우리 모습과 비교시켜 생각해 봤을 때 비슷한 상황, 특히 종교가 거의 사라진 이 시대에는 정치적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보니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시대가 변화할 때 우리는
앞서 호르헤를 중세의 인물상, 윌리엄을 근대적인 존재로 대비시켰지만, 개인이 생각하는 가치가 충돌하는 일상적인 상황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가치에 엄청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결국 호르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을 찢어먹고 도서관을 방화하여 그 속으로 뛰어 자살한 장면은 여러 의미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호르헤는 현존하였다면 세상의 지식과 해석의 여지를 넓힐 수 있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파괴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막을 수 없었다. 종교는 자본에 수축하고 권력을 잃었다. 하지만 또 초기의 기독교를 보면 그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종교를 키운 것이 아닌,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로부터 ‘사랑과 믿음’ 같은 세속 되지 않은 가치를 전하며 세계로 널리 알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독교라는 대상도 여러 가치가 담겨있는 것처럼 그것은 다양한 해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호르헤는 신앙 질서에 대한 권력의 필요성을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르헤의 공포처럼 신앙보다는 자본과 산업이 중시되는 근대로 접어들었으니 말이다. 더불어서 원작자인 움베르토 에코는 중세를 암흑의 시대가 아닌 빛의 시대로 보았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두려워한 시대의 변화에는 그럴만한 이유와 근거가 있다. 상인 세력의 자본화와 인본주의의 복귀(르네상스)는 부패한 세속 종교 권력에 대항하여 부조리를 타파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이미 중세 끝에 도래한 부패한 세력에 대한 성찰 없이 성서 그대로의 과거의 방식과 교리를 주창하는 호르헤의 신념은 받아들일 수 없다.
호르헤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혹은 노스텔지어는 현대에도 계속하여 살펴볼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AI의 시대에 도래한 우리는 과거의 관념을 계속하여 변형 혹은 파괴하는 시험대에 놓여있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일 때 우리 마음속의 호르헤가 있다. 이전에 존재했던 가치를 무너뜨리는 존재에 대한 무의식적인 혐오와 배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어떤 가치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서 온다.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 밑에 있는 진정한 감정은 사회에 드러나선 안 되는 많은 불안과 상실감이 뒤섞여 만들어낸 콤플렉스와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나 보편 가치, 즉 진리라고 믿었던 가치가 변화하는 시기인 과도기적인 시대에는 과거와 현재의 가치를 가르는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에 더 혼란스러운 시기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윌리엄보다 호르헤에게 머리보다 가슴으로 이해하는 측면이 더욱 많았다. 나 또한 현재의 불확실성의 시대가 불안하고, AI라는 존재가 나의 의지와는 달리 점점 사회에 적용되는 모습들에 반감을 강하게 느꼈다.
그렇기에 단순한 도구로서의 AI 활용을 넘어서,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와 논쟁이 가능한 환경, 즉 윌리엄과 아드소가 책과 세계를 해석했던 그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기호가 끊임없이 의미를 미끄러뜨리는 시대에,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바로 그 불확실함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불확실함 속에도 혼란을 절제하는 윤리, 그리고 그 속에서 나만의 견해를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과정에 대한 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