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취미 중 하나는 유명하지 않은 곡을 찾아서 나만의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하는 것이다. 지금은 사라진 싸이월드에서 전학 간 친구를 찾기 위해 파도타기를 했던 것처럼 멜론, 애플, 사운드 클라우드, 유튜브를 횡단하다 보면 보석 같은 노래를 한 두 곡정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이미 벗어난 과거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노래를 현대에 만나는 순간에는 소소한 쾌감을 느낀다. 열심히 모은 노래를 주변 사람과 나누며 함께 청취할 때는 그 노래에 힘을 보태준 것 같아 내심 뿌듯하기까지 하다.

‘어스(EARTH)’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2000년에 데뷔한 어스는 토고 유카, 토모나가 마야, 세토야마 사야카로 구성된 일본의 삼인조 걸그룹이다. 데뷔곡 ‘time after time’의 인기 덕에 이들은 제42회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 제33회 일본 유선대상 유선음악상을 수상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해당 곡은 드라마 <버츄얼 걸(バーチャルガール)>에 삽입되기도 했다. 성공적인 데뷔는 가요계에서 주목받는 가수가 될 것이란 설렘을 안겨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의 전성기는 데뷔에서 멈춘다. 데뷔곡으로 고점을 찍은 뒤부터 발매한 앨범에서 저조한 성적을 지속적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과열된 경쟁으로 생존이 어려운 가요계에서 결국 어스는 5년간 짧은 활동을 하다가 해체되고 만다.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그룹은 이제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현지에서도 이 그룹을 아는 사람이 드물어졌다.
대개 사람들이 말하는 ‘슈퍼스타’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한 그룹에게는 ‘비운’이라는 수식어가 달린다. 어스도 예외는 아니다. 스트리밍 앱에 이들의 노래가 업로드되어 있긴 하지만 데뷔곡을 제외한 나머지 곡에는 가사조차 삽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동정의 시선으로만 어스를 평가하기에는 곡의 멜로디와 가사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가짓수가 적은 앨범 안에서도 이들은 자기 그룹만의 개성을 표출하고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들어도 세련된 멜로디와 선연한 가사는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심을 듬뿍 담아 어스의 재능과 매력이 가득 담긴 세 곡을 추천하는 것으로 지면을 채워보고자 한다.
time after time
앞서 언급했지만, ‘time after time’은 어스가 발매한 곡 중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린 곡이다.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곡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여러 번 자신의 마음을 반복해서 고백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보컬은 서툴고 투박하게 마음을 전달하는 화자의 심정과 맞물리고, 별빛 같은 멜로디는 사랑의 순수함을 부각시킨다. 도입부부터 어스의 세 멤버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하모니가 흘러나오면서 청자의 귀를 사로잡는다.
이 곡의 백미는 가사에 있다. 사물과 자연물에 빗대어 마음을 표현한 가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듣다 보면 마치 시 한 편을 읽는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비’, ‘투명색 우산’, ‘하늘’, ‘바람’, ‘해바라기’ 등 색감, 온도, 감촉이 느껴지는 단어들이 곡을 풍성하게 채우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자기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게 한다. 이 곡은 인기에 힘입어 힙합 소울 버전으로 EP 앨범이 출시되기도 했는데, 원곡의 매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또 다른 느낌을 선사한다.
time after time
叶えられてく 永遠の風の中で
이루어져 가는 영원한 바람 속에서
たった1人の かけがえのない人になりたい
단지 한 사람의 영원한 사람이 되고 싶어
time after time
寄り添って 咲く向日葵のように
다가와요 피어나는 해바라기처럼
朝も夜も冬も孤独も ずっと照らせるように
아침도 밤도 겨울도 고독도 계속 비칠 수 있도록
YOU & I
어스의 두 번째 앨범 [Your song]의 수록곡 ‘YOU & I’에서는 데뷔 앨범과 달리 멤버들의 짙은 호소력을 느낄 수 있다. 2000년대 발라드 특유의 정서가 담겨 있는 이 곡은 밝으면서도 아련한 곡으로 데뷔한 어스가 서글픈 정서까지 곡에 녹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연인과의 이별이 주제지만, 이를 고통스러운 끝맺음이 아닌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정서가 극대화되는 이유에는 멤버들의 청아한 목소리가 한몫한다. 뻗어나가는 가느다란 고음과 기교를 부리지 않는 보컬 스타일은 보통의 이별을 말하는 데 효과적이다. 이는 누구나 겪어보았을 이별을 담담하게 가슴 한켠에 묻어두도록 해준다. 감정을 쥐어짜지도 않고 마냥 울게 만들지도 않는다. 듣다보면 어쩐지 쓸쓸한 기운이 감돌지만, 노래가 끝난 뒤에는 미소를 짓게 된다. 반드시 펑펑 울어야만 슬픔에 최적화된 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스는 이별을 시간에 섞어 흘려보내준 뒤, 자기만의 반짝임으로 마무리짓는다.
そっと瞳を閉じると
살짝 눈동자를 감으면
懐かしい優しさに包まれる
그리운 상냥함에 휩싸여
想い出がいっぱい in my love
추억이 많아 in my love
この胸に輝くから
이 가슴에 빛나니까
(…)
あの日の笑顔のまま
그날의 웃는 얼굴 그대로
そっと胸にしまっておくから
살며시 가슴에 담아둘 테니
いつの日か きっと 笑って話せる
언젠가는 반드시 웃으며 얘기할 수 있을 거야
brand-new day
2001년을 바쁘게 보낸 어스의 마지막 앨범 [color of seasons]의 두 번째 트랙인 'brand-new day'는 세련미를 강조한 곡이다. 멜로디만 거칠게 들어봤을 때 FreeTEMPO, m-flo 등 장르적으로 자유로운 시부야 케이를 연상케하기도 한다. 이전 앨범보다 한층 매끄러워진 목소리와 짧은 호흡으로 찍어 누르듯 부르는 기술이 돋보이는 곡이지만, 가녀린 음색이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어스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여리다'와 '단단하다'가 모순적으로 합쳐진 이 곡은 이제껏 어스가 발매한 곡 중에서 가장 돋보인다.
가사에서는 적극성이 드러난다. 바로 직전 앨범인 [MAKE UP YOUR MIND]에서는 강렬하고 펑키한 느낌의 음악을 선보이면서도 지고지순한 사랑을 말했다면 [color of seasons], 그중에서도 'brand-new day'에서는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서로 사랑하며 미래를 그려보자고 먼저 제안한다. 즉, 강렬한 빨간색으로 채워진 앨범에서 어스가 선택한 것은 주체성이라 할 수 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청바지를 입었던 그녀들은 이제 화려한 장신구를 두르고, 자기가 가야 할 길로 나아가며 그들만의 성숙함을 드러낸다. 그 성숙함은 지난 활동들에서 어스가 배우고 익힌 가창력과 무대 매너, 음악을 대하는 태도일 것이다.
You can hold on, you can dream on
You can kiss me, forever
叶えてゆけそうな 未来が見えるよ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미래가 보여
You can hold on, you can dream on
You can love me, forever
同じ気持ちでずっと
같은 마음으로 계속
2人で brand-new day
둘이서 brand-new day
(…)
人は誰もがきっと 悲しみを知るたび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슬픔을 알 때마다
愛される喜び覚えて行くもの
사랑받는 기쁨을 기억하고 나아가는 것
今もう一度だけそう恋をするなら
지금 한번만 더 그렇게 사랑을 한다면
終わりなんて来ないように
끝 따위는 오지 않도록
어떤 노래는 귀로 들어오는 순간, 내가 무감하게 통과해 온 시간으로 나를 데려다 놓는다. 2000년대 초반은 어스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이자 내게는 만화나 동요를 떠올리게 하는 과거이기도 하다. 문득 시대의 감성을 머금은 어스의 노래가 공간을 채우면, 나는 2000년대 초반을 살아가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상상의 공간에서 나는 그 시대 어른들의 전유물이었던 폴더폰을 사용해서 친구와 전화하고, 치렁치렁한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 시디플레이어를 재생한다. 동경했던 어른의 차림새를 한 채로 길거리를 누비고, 어떤 이와는 마음껏 사랑하며 나만의 이야기를 그려나가기도 한다.
어스의 노래에는 지나간 시간을 마음대로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단지 그들의 유명세가 다른 가수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이유로 '망했다'는 시선을 보내는 건 무의미하다. 앨범 한 장을 만들기 위해 여러 사람과 협력하고, 지난한 시간을 들이고, 울며 고민한 과정이 '비운'이라는 꼬리표 하나로 뭉개지는 게 과연 그들이 예상했던 결과일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어스는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로 끝난, 안타까운 그룹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해 두고 싶다.
어스의 가사를 살펴보면 유독 '바람'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바람의 종류도 여러 가지겠지만, 어스의 곡에서 느껴지는 바람은 이제 막 여름을 벗어나 기분 좋은 찬기를 두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에게는 지겹고, 누군가에게는 아쉬운 여름이 서서히 지나간 뒤 다가오는 가을과 닮아있다. 언젠가 가을이 자취를 감출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들려와도, 매번 가을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처럼 어스가 그린 선율도, 공들여 만든 음악 세계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의 노래가 긴 세월을 지나 아주 멀리 떨어진 내게 당도했을 때, 피부로 느꼈던 환상과 감동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기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