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리(Napoli)는 남부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로마와 밀라노에 이은 이탈리아 제 3의 도시다. 지중해와 맞닿은 항구도시인 나폴리는 예로부터 유럽의 예술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어왔다. 괴테가 남긴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Vedi Napoli e poi muori."라는 말이 있듯이, 나폴리는 찬란한 햇살과 유서 깊은 역사, 지중해의 활기찬 일상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장소다.
한편 나폴리는 최근 몇 년간 우리에게 부쩍 친숙해진 도시이기도 하다. 축구 국가대표팀 수비수 김민재 선수가 세리에 A의 명문 구단 SSC 나폴리에서 뛰며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리얼리티 프로그램 ‘흑백요리사’의 우승자인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 또한 나폴리를 테마로 한 음식들을 선보여 화제가 되었다.
환상을 품게 만드는 도시 나폴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난 8월 1일,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나폴리가 캔버스에 담겨 왔다. 삼성역에 인접한 도심 속 대형 미술 전시 공간 마이아트뮤지엄에서 2025년 8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개최 중인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19세기 컬렉션: 나폴리를 거닐다] 전시를 다녀왔다.

이번 전시는 이러한 나폴리의 정서와 풍경이 19세기 회화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조망하는 전시다. 마이아트뮤지엄과 이탈리아 국립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과 협력하여, 그들이 소장한 19세기 회화 컬렉션을 통해 이탈리아 남부가 겪은 사회의 변화와 그 시대의 삶을 아시아 최초로 펼쳐 보인다.
카포디몬테 미술관은 이탈리아 남부 최대 규모의 국립 미술관이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약 47,000점에 달하는 방대한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1957년 정식 개관 이후, 르네상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및 유럽 미술의 흐름을 포괄하는 소장품을 바탕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선 라파엘로(Raphael, 1483–1520),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등 서양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들의 주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아울러,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조셉 코수스(Joseph Kosuth, b. 1945) 등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도 함께 소장하고 있어,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폭넓은 예술적 흐름을 아우른다.
그녀들을 마주하다.
이번에 한국을 찾은 19세기 나폴리 미술 컬렉션 역시 중요한 소장품 중 하나로, 포질리포 학파의 풍경화 양식(veduta)부터, 필리포 팔리치(Filippo Palizzi, 1818–1899)의 사실주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을 아우르고 있다. 처음으로, 회화 속 여성 형상과 그에 투영된 이상을 통해 당대 사회의 가치관과 감수성의 변화를 살펴본다.
여기서 특히 필자의 시선을 끈 작품들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었다. 이탈리아의 오리엔탈리스트 화가들은 고전 속 이야기를 여성의 형상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다. 동양적인 분위기를 살린 화풍으로 여성들이 보다 매혹적으로 묘사되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낭만주의나 인상파 작가들이 선보인 표현과 한결 다른 색감이 그림 속 주인공에게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빈첸초 부시올라노(Vincenzo Busciolano), <가엾은 사포, 1876>
빈첸초 부시올라노의 <가엾은 사포>는 고전 문학 속 그리스 여류시인 사포라는 비극적 인물을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사포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 깊은 슬픔에 잠긴 순간을 떠올려 작품을 완성했다.

안드레아 페트로니(Andrea Petroni) <여인상 / 원해요!>
나폴리에서 활동한 안드레아 페트로니(Andrea Petroni)는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사이를 넘나드는 작가다. <여인상 / 원해요!>는 넓은 흰 쿠션 위 나른하게 누운 여인을 묘사했다. 동양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작업실에서 상상에 기반해 ‘동양적인 장면’을 창조하고자 한 19세기 화가들의 작업양식이 드러난다.

조반니 볼디니(Giovanni Boldini) <공원 산책>
이탈리아 출신 화가 조반니 볼디니(1842~1931)는 생의 대부분을 파리에서 살며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벨 에포크(belle poque)’ 시대의 최상류층과 교류하며 사교계 여성들을 모델로 삼았고, 커다란 명성과 부를 이뤘다.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이지만, 활동 무대가 달랐던 볼디니의 개성이 느껴진다. 상대적으로 더 알려진 작가의 작품도 함께 만나볼 수 있다는 점이 관람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빛이 있었고, 삶이 있던 곳
도시 교외와 지중해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를 통해 이탈리아 남부의 일상과 자연을 들여다보는 전시의 네 번째 섹션 역시 인상 깊었다. 나폴리, 그리고 지중해라면 떠올릴 법한 풍경들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화사하고, 햇빛 가득한 그림들은 아니었다. 19세기 초, 나폴리를 중심으로 활동한 포질리포 학파, 레시나 학파 등은 미술의 이상화된 풍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들은 실제 나폴리의 해안선, 폐허가 된 유적,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사람들을 화폭에 담았다.

안토니노 레토(Antonino Leto) <배와 거리의 아이들>
안토니노 레토는 팔레르모에서 풍경화를 공부하다, 나폴리로 옮겨오며 레시나 학파의 화풍에 매료되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에서 모레를 장난감 삼아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이들 뒤편에는 몇 척의 보트가 대각선으로 배치되어 멀리서 보면 사진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빈첸초 카프릴레(Vincenzo Caprile) <해변에서>
레시나 학파와 나폴리 자연주의 화풍에서 영향을 받은 빈첸초 카프릴레는 해안을 배경으로 한 일상적 장면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변에서>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작품처럼 느껴진다. 애써 아름답게 그리려고 하지 않아도, 휴양지에서 익살스레 노니는 연인이 떠오르지 않는가. 환상을 가지도록 만드는 나폴리의 일상이란 이런 게 아닐까. 개인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필자는 올여름 한 번도 여행을 못 갔다. 가려면 갈 수야 있었겠지만, 쫓기는 심정으로 떠나고 싶진 않았다. 대신 이런 문화 예술을 찾는다. 그림 앞에서 머무는 몇 초 동안이라도, 정신없는 주변 상황에서 벗어나 타인의 시선에서 훔쳐볼 수 있는 경험은 여행만큼이나 특별하기 때문이다.
‘나폴리를 거닐다‘라는 주제에 걸맞게, 전시 곳곳에는 19세기 나폴리가 군주제에서 이탈리아 통일(1861년)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기와, 시대가 변함에 따라 달라지는 문화들에 대한 해설이 숨어있다. 비록 우리는 그 시대의 나폴리를 직접 걸어보지 못했지만, 전시 속에서 마주하는 인물과 풍경, 남쪽 햇살 아래 반짝이는 바다를 통해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19세기 컬렉션: 나폴리를 거닐다]는 11월 30일까지 마이아트뮤지엄에서 만나볼 수 있다.

